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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자카르타에서 롬복까지의 1990년 여름의
여행 메모를 정리하여 쓴 기행문 입니다.-
글/사진
: 崔 南 洵
서울을 출발하여 자카르타에 도착하는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은 11시 35분 정각에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출발에 앞서 면세점에서 88담배
3보루를 사서 핸디 케리어에 넣었다. 담배는 기호품이 되어서 피던 담배를 피워야지 다른 담배는 입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날
때 마다 여행 일수를 계산하여 담배를 준비하곤 했다.
내가 자리한 비행기의 좌석은 맨 뒤 자리에 있고 주변은 단체로 발리 여행을 떠나는 우리네 여행자들이 보였다. 비행기 안에서는 내내
오늘 저녁부터 펼쳐지는 인도네시아의 모습은 내게 어떻게 비춰지고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아주 참담하고 황당한 일은 없을지? 언제나 여행을
떠날때면 끝없는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마음은 항상 설레어 왔다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덧 비행기는 싱가폴 창이 항공에 도착하여 1시간여 공항내 머무르게 되었다. 공항에서 보는 싱가폴의 모습은 서너번 왔던 예전과 같이
깨끗하였고 푸르렀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흡연석을 찾았다. 공항은 대단히 깨끗하였다. 흡연지역도 일반좌석과 구분하여 자리를 했지만 일반자리와
똑같이 옆자리에 배치해 놓았다. 우리 김포 공항은 몇해전부터 유리감옥같은 곳 2평 남짓하게 배치하였지만 이곳은 지역만 구분하였을 뿐이였다.
다만 환기 장치가 잘되어 있었다. 천천히 공항 면세점을 돌아다녔다. 상당히 고가품의 상품이 진열되었으며 좀싸게 느껴지는 전자제품도 싱가폴
내의 전자 상가보다 비싸게 전시해 놓았다. 다시 창가로 가서 시내를 바라보니 시내의 알만한 곳들이 손에 잡힐 듯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가루다 항공은 싱가폴 공항을 이륙하여 자카르타로 향하기 시작했다.
싱가폴 공항을 이륙하면 바로 인도네시아 영공이었다. 어둠이 깃드는 인도네시아의 하늘은 석양빛에 아름다웠고 내게 곧 다가올 미지의 세계로
마음을 더욱 설레게 했다.
사실은 몇해전 싱가폴 여행시 [바탐]이라는 작은 인도네시아의 섬을 일일관광한 적이 있지만 거대한 인도네시아의 첫밤은 지금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항공기가 고도를 낮추자 자카르타 시내와 공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착 시간이 저녁 7시 30분. 한국 같으면 아직 환한 시각이지만
이곳은 완전히 어둠이 깃들었다. 자카르타 공항은 아직 최신 설비가 되지 않은 탓인지 많은 항공기를 동시에 공항청사에 대지 못하여 탑승객은
버스를 타고 공항청사를 향해야만 했다. 입국 수속과 베낭을 찾아 공항을 나섰다.
예상 밖으로 공항은 한산했고 유객꾼들도 별로 없었다. 약간의 돈을 환전하고 인포메이션에 찾아가 자카르타 시내 지도를 입수했다.
한국의 아는 분의 알선으로 이곳에 있는 한국 회사의 직원이 공항에 마중키로 약속이 되어 있으나 찾는 사람이 없었다. 할수없이 시내로 나가는
리무진 버스편을 알아보고 돌아오니 한국상사 회사원이 공항에 도착하여 그분의 안내로 택시를 타고 주식회사 신원의 인도네시아 지사로 향했다. 이
회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섬유와 카펫을 생산하여 유럽시장에 수출을 하고 있으며 현지 공장은 3교대로 24시간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나는 우선
인도네시아의 실정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얻었다. 물가, 숙박비, 화폐의 가치등은 내가 여행하는데 최초로 알아 두어야 할 사항이었다.
인도네시아의 경제사정, 국민성, 민족간의 갈등, 지역간의 경제적 차이, 기후 등은 앞으로 여행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게 될 것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새벽 2시까지 회사 직원과 환담을 하다 사무실에 딸린 숙소에서 첫밤을 지냈다.
Jakarta의 출발은 Merdka square 로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 주변의 주택가를 산책하고 돌아와 인도네시아 여자가 지은 한국 음식을 먹게 되었다. 이제 자카르타 시내 관광을
하기 위해 출발하려 하니 회사에서 제일 먼저 어딜 가보려느냐고 해서 므르데카 광장(Merdka squ-are)을 나가겠다고 하니 그곳까지 찦차로
데려다 주고 조심해서 다니라고 일러주고 떠나갔다. 므르데카 광장은 넓은 공원이었다. 그 중앙에 독립기념탑 모나스(MONAS)가 우뚝
솟아있다. 인도네시아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이곳에 담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나스의 높이 137m 맨 꼭대기의 횃불은 황금 35kg을 들여 만들었다 한다.
이곳은 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저녁 무렵이면 모여 들어 휴식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모사스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운행되고 있었으며, 이 관망대에 올라가면 자카르타 시내 사방이 한 눈안에 들어오게 되어 자카르타를 대강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모나스
지하에서는 전시실이 있어 화란과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가 그림과 모형물로 꾸며 있었다.
모나스를 관람하고 좀 떨어져서 탑을 관망하기 위해 길가로 나오니 한무리의 서양 관광객이 시티 투어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모나스를
향해가고 있었다.
이번엔 대통령궁을 찾기 위해 므르데카 광장의 가장자리로 나와 대통령 궁을 찾으니 어느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벤취에 앉아 있는 남여
고등학생에게 다가가 물었다. 상업학교 학생들이라는 이들은 부제 수업으로 오후 수업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통령궁을 물으니 이 학생들은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지도를 펴놓고 한참을 얘기해도 내가 알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길을 건너 한 관공서의 수위에게 물으니 바로 근처에 대통령궁이 위치하고 있어 200m를 가니 대통령궁이 있었지만 위병이 이 앞으로 가지
말고 길 건너로 가라고 저지했다. 대통령궁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 안된다고 제지한다. 하는 수 없이 길 건너로 건너가 대통령궁을 보니 궁의
정면은 다른 건물과 비교해 특별한 것이 없었고 다만 가루다 문장이 건물에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건너편 위병이 바라보는 앞에서 결국
사진 한장을 찍을 수 있었다. 원래 네델란드 총독부의 궁전이 있으나 지금은 외국국빈을 대접하는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관저에서 오른쪽으로 철도 건너편에는 아시아 최대 이스람 대사원(Mesjid lstiglal)이 있다.
지붕의 돔은 흰 밥공기를 엎어 놓은 듯한 지붕이다. 1만명 이상이 예배를 볼 수 있는 사원으로 남여가 함께 예배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흰 베일을 쓴 여자 신도들은 다른 장소에서 예배 볼 수 있게 되어있다. 이 이스람대사원 바로 맞은 편에는 대카톨릭 교회(Gereja
Kathedral)가 있다. 인도네시아 국민의 90%가 이슬람교 신자지만 길하나 사이를 두고 카톨릭 교회가 있다는 것은 다른 이스람 국가에
비해 색다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나라도 이슬람 다음으로 많은 것이 카톨릭 신자이다.
전체 인구의 비율로 볼때 미미한 숫자지만 프로렌스섬 같은 곳은 90%가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다. 이런 이슬람 국가에서 다른 종교에
대한 박해나 비방 같은 것이 없는 것이 이 나라의 특징이기도 했다.
모나스의 서쪽 므르데카 바랏 거리에 국립 박물관(Museum pusat)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인도네시아의 지방마다 다른
문화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 옆에 있는 휴게실에서 음료수를 사서 마시고 있는데 서양 여자 둘이 음료수와 비스켓을 사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이들은 비스켓 봉지를 뜯으려 했으나 잘 뜯기지 않아 애쓰고 있어 내가 달라고 해서 뜯어 주었더니 상당히 고마워한다.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모녀간이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한다. 궁금해서 더 케어 물으니 미인인 젊은 여자가 자기 보이 프렌드의 어머니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앞으로 시어머니가 될거냐고 물으니 아직 결정을 하지 않았지만 여행이 끝나 돌아가면 결정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서양 사람들의
숨김없고 솔직함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일면이기도 했다.
박물관은 각 지방의 유물과 민속, 생활 양식을 전시해 놓았으며 석조물은 옛 힌두 문화의 유산이 많았으나 인도의 것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이 박물관에서 꼭 보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원시인.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자바원인)의 두개골이다. 이 두개골은 2개가
있었으며 그외의 파손품도 있었지만 두개골의 모양이 조금 작아 보였다. 회랑을 돌아보는 동안 젊은 프랑스 여자는 가끔 카메라 셧터를 눌러주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Taman Mini Indonesia Indah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동부 자카르타에 있는 다만 미니 인도네시아 인디( Taman Mini Indonesia Indah)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말로 한다면 아름다운 인도네시아 미니 공원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수하르트 대통령 부인이 제안하여 건설하게 되었는데 대학생들이 국고의 낭비라고 반대 운동까지 일어나는 우여곡절 끝에 완성되었고
이제는 외국에서 오는 귀빈의 견학 코스가 되었고 인도네시아 최대 레크레이션 센타가 되어 있었다.
공원을 가기 위해 박물관 앞에서 몇 사람에게 그곳 가는 버스를 물어 보아
버스 번호를 확인하고 버스에 올라 부탁을 하고 느긋이 자리를 잡았다. 한참을 가도 차장이 내릴 지점을 알려 주지 않아 궁금해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켜준다. 아직 멀었느냐고 물으니 자기가 알려주겠단다. 당신도 그곳까지 가느냐고 하니 자기도
대학생으로 찔리리탄 바로 전 정류장에서 내린단다.
이젠 느긋하게 앉아 있으려니 여학생 쪽에서 말을 걸어온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어느곳을 여행하느냐 등등의 질문으로 내 여행이
끝날때까지 계속해서 들어야 하는 일상의 질문들이었다. 옆에 있는 아주머니까지 우리 대화에 끼어들고 보니 재미있는 버스안이 되고 말았다.
이때다 싶어 나도 앞으로 가게될 곳의 여행 정보 몇가지를 챙기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여학생이 내리고 얼마를 가니 아주머니가 함께
내리자한다. 찔리리탄 이냐고 물으니 이곳이라고 알려주며 따라 내리라고 한다. 어느 고가가 시작되는 지점에 내리니 혼잡하고 어디서 차를 타야
할지 헷갈리기 쉬운 지점이다. 아주머니는 외국 사람이 이곳에서 차를 갈아타기가 어려우니까 직접 길을 건너 차를 알려주고 내가 차에 탄것을
확인하고 손을 흔들어 준다. 정말 친절한 호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흔들어 주었다. 콜트로 찔리리탄에서도 따만 미니 인도네시아 인디는 20여분을 더 가서 도착하였다.
이곳은 입구부터가 선진국의 위락지와 같이 산뜻하고 잘 정비되어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여 기념탑쪽으로 가니 박물관이 자리했고 무료
버스가 각방면으로 순회하며 관람객을 정기적으로 운행하며 날라다 주었다. 우선 이 버스를 타고 식당을 찾아 갔다. 식당은 현대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손님은 내국인은 하나도 없고 외국인 몇명만 자리했다. 음식가격은 다소 비싼편이지만 우리네 가격에 비하면 아주 싼값이어서 첫번째
인도네시아 음식을 먹는데는 호화스런 식사가 아닐수 없었다. 이곳 종업원의 매너 또한 일급 수준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인도네시아 전체의 윤곽을 알고자 관람에 들어갔는데 오후 한나절 시간으로는 무척 부족한 시간이었다. 다소 무리한 강행군을
시작하기로 하고 인도네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27주를 대표하는 민족 주거지를 돌아보고 그곳에 있는 민족의 문화 의상, 공연물을 돌아봤다.
공원의 중간 인조 호수에는 인도네시아의 지도가 만들어져 있어 로프웨이를 타고 전 국토를 관광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각 주마다 건축 양식도 다양했고 많은 민족이 사는 나라라 문화 양식도 주마다 판이하게 달랐다.
발리관에 들렸을때 이곳에서는 레공댄스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어린아이에서 나이든 처녀들까지 매우 진지하게 연습을 하여 열심히 구경을 하는데
한쪽에선 촬영 준비를 하고 있어 물어보니 레공댄스 선전을 위한 촬영이 있다고 한다.
뒷편 건물로 가니 한 레공 댄서가 분장하고 있어 분장 모습을 구경하고 있자니 아주 미인인 분장사가 의자를 권하며 앉으라고 한다.
이 분장사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여 내가 의사를 교환하기엔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촬영기사도 합세하게 되었고 이들과 금세 친숙하게
되자, 이들은 촬영이 끝나면 차를 마시자고 제의해 왔으나 내겐 시간이 없지 않은가. 이곳을 빨리 돌아보고 오늘밤까지 안쫄을 방문해야 하는
일정에서 조금 시간을 낭비해서 자카르타에서 하루를 더 보내야 한다면 여행 출발서부터 정상궤도에서 이탈하게 되지 않는가. 참고 자리를 뜨자,
아무리 예쁜 여자의 청이라도 한가할때가 따로 있는 것, 일정이 있어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하니 완전히 단장한 레공 댄서와 사진이라도 찍고
가라고 한다.
발리관에서 많은 시간을 지체하여 남은 지역을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가쁘게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다 보니 벌써 오후 5시 30분 아직 더 돌아보아야 겠으나 여기서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Ancol Dreamland
안쫄 유원지(Ancol Dreamland)를 찾아가기 위해 찔리리탄으로 미니 버스를 타고 나왔다.
찔리리탄 버스 정류장은 길가에 있었고 잘 정비된 정류장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안쫄 방면으로 가는 2층 버스를 타고 달렸다.
시내는 퇴근길이라 상당히 혼잡했고 승객은 퇴근하는 사람, 학생들로 가득했다. 이 버스로 안쫄까지 직접 가지 않기 때문에 안쫄 근처까지
가서 다시 차를 갈아타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한참을 가도 안쫄 근처에는 도착되지 않았다. 밖은 어둠이 깃들어 밖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옆에 있는 승객을 잡고 안쫄을 물어본다.
언어의 소통도 잘 안되고 가는길도 복잡하여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이사람 저사람 계속 물어 볼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를 그러다 한 젊은이가 이곳에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타라고 일러준다.
얼른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이곳에서 안쫄가는 버스는 없다고 일러준다.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기로
했다.
자카르타의 택시는 미터기에 의한 요금이어서 시비거리가 없어 좋았지만 안쫄에 도착하고 보니 요금이 하루 숙박비에 해당하는 비싼
금액이었다. 안쫄에 도착하여 식당에 들려 사테를 시켜 저녁식사를 했다.
맥주도 한 잔 기울였다. 옆 식탁에 앉은 독일인 여행자와 식사를 하며 환담을 하다 헤어졌다. 안쫄의 예술가 거리를 거닐며 미술품을
감상하며 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며 걷다가 가라오케가 있어 들려 보았다. 한곡을 부르는데 500루피(200원)의 요금을 지불하는데
현지 젊은이들은 팝송과 자기네 노래를 잘도 불러댔다. 한국노래가 있냐고 물으니 없단다. 그냥 돌아나와 안쫄을 돌아보려니 너무 넓어 걸어서는
불가능한 지역이였다. 어두워서 감도 잡을 수 없어 해안가로 나가 보기로 하고 비나리아 해변(Pa-ntal Bina Ria)으로 향했다.
그곳까지 가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해안가에는 음식점이 늘어서 있고 많은 차량들이 주차해 있으나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참 조용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비취를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이상한것이 있었다. 대부분의 차량들이 시동이 켜져 있었고 차량마다 유리창을 가린 상태로 있어 유심히 보니 차량마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것이 아닌가. 비치 길건너로 좀더 걸으니 야외 무대에서도 히피 스타일의 젊은이들이 공연을 하고 비치에 놀러나온 사람들이 그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스타의 꿈을 꾸고 있는 젊은이 들이라 생각되었지만 우리나라나 외국이나 젊은 사람들의 머리나 복장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음을
느꼈다.
밤도 깊어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차편을 알아보니 버스가 없었다. 할수없이 택시를 타고 딴중 쁘리옥항을 거쳐 항구 밖에 내렸다.
이곳에 바자이를 타기로 하고 숙소로 가려니 모두 너무 멀어 그곳까지 가지 않는단다. 할수 없이 중간지점인 모나스까지 가기로 하고 흥정을
했다. 6,000루피에 간신히 흥정을 마치고 자카르타의 밤거리를 달리기 시작햇다.
오토바이형 차량이 위험하게 달리는 스릴을 한껏 맛보고 난뒤에야 모나스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숙소까지 가는 바자이를 흥정하다 보니
30분이 소요되었고 숙소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어섰다. (주) 신원의 직원은 무슨 사고가 났나하고 근심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Jakarta
내일은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 Jakarta >를 떠날 생각을 했다. 원래 일정은 하루를 더 묵을 예정이였지만 한
나라의 수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크게 볼것이 없었다. 오래된 고도가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 유산이 없었던 것도 한 이유이리라. 그러나 인구
800만이 넘는 동남아 최대의 도시고 인도네시아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이기에 개발도상국들에서 보는 현상처럼 지방의 젊은이들은 청운의 꿈을 가지고
자카르타로 모여 들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야심찬 젊은이들의 대부분 좌절하고 일부는 그 꿈을 실현하리라.
자카르타에 처음 방문하면 잘 정돈된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교통법규가 잘 지켜지지 않고 적당히 길을 횡단하여 건너고 할일없는
젊은이들이 길가에 모여 있고,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차량의 통행 방향이 달라 한동안은 길을 건너고 차도를 건너는데 혼잡스럽다.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생활과 급격히 도시화한 현대가 각기 공존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백화점이나 번화가는 여느 국제 도시에 하나도 손색이 없다. 물가도 한국에 견주어도 상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네의 물가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서민이 살아가는 모습은 예외로 생각해야될 것이다.
고원도시 반둥(Bandung)
반둥으로 출발하기 위해 감비르역으로 나갔다. 미리 예매가 되지않아 출발전에 창구에서 줄을 섰다가 한시간만에야 매표를 시작했다.
2등표를 사고 시간이 있어 2층에 있는 일본식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열차에서 식사 배달이 되지만 입맛에 맞는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상당히 깨끗한 식당이었고 음식은 우리의 입맛에 잘맞았다.
열차는 정시에 출발하였고 자카르타를 벗어나 얼마를 달리고 부터는 산림이 우거진 고원지대로 접어들었다. 열대산림이 연속되었고 그곳에도
계속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공원이나 산업시설은 볼수 없고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였고 벼농사는 추수와 모내기를 번갈아 볼 수 있어 연중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풍요로움을 볼 수 있었다.
일기도 자카르타와 달리 서늘해 여행하는 나에겐 매우 상쾌하였다. 반둥역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 30분경, 부지런히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첫번째 찾아간 호텔은 만원이었고 두번째도 만원 세번째 호텔은 20,000루피(8,000원)라 더 싼곳을 찾아 보기로 했다. 이젠
역의 반대쪽으로 갔지만 적당한 가격의 깨끗한 호텔은 전부 만원이어서 나를 당황시켰다. 빨리 숙소를 찾아 한숨돌려야지 밤이 되면 곤란하지
않은가. 조그만 로스맨이 있어 가보니 6,000루피 아주 싼 가격이어서 방을 달라고 하니 내일 오면 꼭 방을 주겠단다. 이곳도 벌써 외국
여행자로 만원이었다.
사람들에 물어가며 어느 여자의 안내를 받으며 몇곳을 찾아 보았지만 빈방이 없거나 4-5만 루피의 비싼 방 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2만루피 한다는 호텔을 다시 찾아갔다. 방을 달라고 하니 2만 루피 방은 그 사이 다 나가고 2만 5천 루피의 방밖에 없다고 한다. 할수
없이 25,000루피에 방을 얻고 보니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호텔은 좋으나 방이 비좁고 환기가 잘안되는 그런 방이였다. 허나
어쩌랴!
짐을 호텔에 두고 다고티 하우스(Dago Tea House)로 향했다. 반둥시의 북쪽 산위에 있는 이곳은 작은 미니 버스를 타고
산기슭을 가다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이곳으로 가는 길가의 집들도 서구식으로 지였고 부호들의 별장이 많다고 한다. 다고 티 하우스에서 본 전망은 반둥시의 야경을 볼 수
있었고 여유로운 현지인들이 차를 들고 외식을 하며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한국의 원두막 같은 곳에 앉으니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는데 메뉴에는 아는것이 없었다. 마침 건너에 현지 여대생들이 있어 그들이 먹는
음식을 보니 먹을만 했다. 학생들에게 음식 이름을 물어보니 친절히 알려 주었다.
학생들에게 음식 이름을 알아 그들과 똑같은 음식을 시켰다. 조금후 나온 현지 음식은 우선 손을 씻을 수 있는 물이 나왔다. 바나나
잎에 싸서 찐 밥과 야채, 닭고기 튀김등이 나와 먹기에 괜찮은 편이었다. 학생들의 먹는데로 따라 먹지만 그들처럼 손으로 밥을 먹기엔 서툴 수
밖에 없었다.
식사를 하며 반둥 주변의 볼거리에 대하여 안내를 받았다. 한학생을 제외하곤 영어를 유창히 구사했고 현지인으로 보기엔 외모가 깨끗하고
세련되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고 티 하우스 주변을 구경하고 돌아가려 입구를 나서는데 한 학생이 무어라 소리치며 다가왔다. 멈추어서서
있으니까 반둥시내로 가느냐고 묻는다. 지금 시내로 가는길이라고 하니 함께 가자고 제의한다. 왠 횡재란 말인가.
선뜻 승낙을 하고 산길을 내려오려니까 기다리라고 한다. 잠시후 일제 자가용이 내앞에 와서 멈추어 선다. 안에는 여학생이 타고 있어
뒷자석에 올라타니 어디까지 가느냐고 한다. 반둥시의 제일 번화가인 알룬알룬까지 간다고 하니 그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다며 백화점에 내려
주겠단다.
운전을 하는 학생에게 술을 좋아하느냐고 하니 전혀 못한단다. 하기야 회교권 여자들이 술을 하겠는가. 무엇을 좋아하냐고 하니 레몬티를
즐긴다고 한다. 시내에 가서 차를 대접하겠다고 제의하니 집에 돌아갈 시간이라고 하며 내일 시간이 있으면 대학을 안내 해 주겠단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허나 내일 아침 일찍 땅꾸만 뿌라후산의 화산을 올라가야 하지 않는가. 화산에 올라가야 하고 밤에는 솔로로 떠나는 여행 일정
때문에 아쉽게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번화가에 접어들더니 한 백화점 앞에 내려 놓고는 사라졌다.
백화점안은 우리네의 백화점 풍경과 조금도 다름없었다. 다만 유명 메이커 제품들이 우리에 비해 싸다는 것 밖에는-.
백화점에서 알룬알룬으로 발길을 옮겼다. 거리에는 많은 열대과일을 팔고 있고 주변은 백화점, 상가로 반둥 제일의 거리 야경을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Dangkubanperahu
반둥의 아침은 일찍 찾아왔고 호텔의 아침 식사도 부페식이었다. 양식과 현지식이 있는데 현지식으로 간단히 아침을 하고 환전을 하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 은행에 가니 환전을 해주지 않고 다른 은행으로 가라고 해서 그곳에 가니 또 해주지 않는다. 물어물어 한 환전소에 가니
그곳에선 신속히 환전이 되었다. 반둥역에서 출발하는 미니 버스를 타고 렘방으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흔들리며 40여분간 달리니 렘방(Lembang)이다. 작은 시장에는 과일과 야채가 풍성했고 이곳에 오는 주변의
가옥은 잘지어진 별장 같았다. 인도네시아에서 고원지대인 이곳이 부자들의 집들이 많다고 한다.
골프장, 풀, 승마장도 이곳에 있다. 렘방(Lembang) 시장 앞에서 수방행 콜드를 타고 탕꾸만 쁘라후산<
Dangkubanperahu > 등산로 입구까지 가기로 했다. 이 작은 차로 고원의 야채밭 사이와 과수원 사이를 오르내리며 잘도
달렸다.
약간 추위가 느껴질 정도의 날씨였다. 20여분간을 달린끝에 등산로 입구에 도달하고 입산료를 지불하니 산정까지 올라갈 일이
끔찍했다.
마침 10여명의 서양 여행자들이 내게 다가와 함께 차를 빌려 가는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해온다. 좋다고 하니 그들은 미니 버스 운전사와
흥정을 시작했다.
한참 만에 흥정이 끝났나 보다. 모두 미니 버스를 타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 산장에 오르니 추위가 엄습해온다.
갑자기 구토가 날것 같은 느낌이 왔다. 유황 냄새때문인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거대한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분화구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분화구 주위를 한시간 정도면 돌아 볼 수 있었다.
유황 냄새가 더 지독하게 났다. 몇사람의 서양 여행자가 산밑으로 내려 가고 있어 좋은 볼거리가 있나해서 그 길을 따라 내려
갔다.
작은 산길이 가파르게 나있고 30여분간을 내려가니 지열지대가 나타났다.
땅바닥에서 유황연기가 솟아오르고 돌을 발로차면 그곳에서 수증기와 열기가 솟아 오른다. 주변엔 유황 덩어리가 있어 관광객들은 이것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몇군데에서는 펄펄 끓어 오르는 온수가 분출하고 있어 그곳에서 계란을 삶아 먹는데 5분정도가 소요되었다.
산정으로 오르지 않고 옆길로 빠져 밀림으로 된 숲길로 해서 등산로 입구까지 도보로 내려 왔다. 이곳에서 찌아뜨르까지 가는 차를
기다려야 하는데 차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찌아뜨르까지 약간의 돈을 주고 가기로 운전사와
합의를 했다.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다.
등산로에서 찌아뜨르(Ciater)로 가는 길 옆에는 네델란드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광대한 차밭이 전개되었다. 눈길이 머무르는 곳은
전부 차밭 이었다. 잠시 차를 달리다 보니 현지인들이 차잎을 수확하고 있었다. 차를 멈추게 하고 사진을 찍으려 하자 아주머니들이 마구 나를
향해 뛰어 오고 있고 어떤이는 산비탈에서 넘어지며 결사적으로 달려왔다. 왜 그럴까 하고 의아해 하는데 이들은 내 앞에 와서 포즈를 취해
주었다. 몇 장을 찍고 떠나려 하니 돈을 달라고 한다. 아!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그처럼 산비탈을 뛰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100루피(30원)씩을 주고 다시 찌아뜨르로 향했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지만 그림같은 전원이 펼쳐지는 온천마을이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온천과 개인탕, 사우나실, 방가로, 식당, 호텔
등이 잘 가꾸어져 있어 여 행에 피로를 풀려는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장소였다.
온천풀은 탕마다 온도가 달라 적당한 곳에서 수영을 즐길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시 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며칠을 여유있게 쉬고
가기에 적당한 곳이였다. 온천욕을 하니 피로가 풀리고 상쾌한 기분이였다.
호텔 식당에 들어가 점심 식사를 하는데 종업원들이 아주 친절하였고 깨끗한 시설이였다.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를 한 잔하고 현지 종업원에
권하니 매우 좋다고 하며 몇잔을 더 마시곤 했다. 다시 반둥으로 돌아오기 위해 온천장앞에서 콜트를 타니 우리 뒷자리에 네델란드에서 온 노인
남녀가 타고 있어 이들과 어울려 오기로 했다. 이들 중 여자는 국민학교 선생이라고 해서 나도 학교 근무하고 있다고 하니 반가워 한다.
램방을 거쳐 반둥에 다다르니 이들은 숙소를 알려 주며 저녁에 놀러오라고 하지만 나는 밤차로 솔로(Solo)로 가는 차를 예약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아쉬운 작별이였다.
마다랑 왕조의 수도 Solo
숙소에서 베낭을 찾아 메고 여행사로 나갔다. 몇사람의 서양 여자애들도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 여자 아이들이 있어 가는 곳을
물으니 족자로 떠난단다. 여행사 버스가 도착하여 차에 올라 시내의 몇곳을 들려 도착한 곳이 시외곽에 있는 공터였다.
마침 우리가 타고갈 버스도 도착해있어 짐을 싣고 기다리는데 독일 여자 아이들은 자기 차가 없다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 티켓을 보니
그들이 탈 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아 걱정말고 기다리라고 일러 주고 차가 도착하면 알려 주겠다고 하니 고맙다고 과일 하나를 준다. 22살이라는
그들은 4개월째 여행중이고 여행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함께 했다고 한다.
차가 출발하기 까지 기다리는데 솔로의 대학에 다니는 여학생과 이야기를 하게 되어 솔로에서 안내를 부탁하니 4일후에 자기 집을 방문해
달라며 주소를 적어 주었지만 솔로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다고 하니 자기도 족자에서 있다가 4일후에야 솔로에 가게 된단다. 리안이라는 이 학생은
드물게 보는 기독교 신자였다. 어둠이 완전히 깃들어서야 사람들이 모여들고 버스는 출발했다.
달리는 차창밖은 어둠이라서 멀리 볼수가 없었고 마을을 지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집집마다 집앞에 전등을 설치하여 밤새 불을 밝혀 놓은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일 중에 하나였다.
전력의 낭비가 될텐데-. 버스로 새벽에야 솔로의 어느 주유소에 차를 멈추고 모든 사람이 그곳에서 내렸다. 막상 내리고 보니 이곳이
솔로의 어느쯤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변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물어볼 곳도 없었다. 베낭을 메고 큰길가로 나왔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기에는 이른 새벽이었다. 길가에 베낭을 내려 놓고 깔고 앉아 지나가는 차를 잡아 보기로 했다.
밤새 차 속에서 잠을 청했지만 피로함이란 말이 아니었다.
한참을 앉아 있는 후에야 지나가는 인력거(Losmen)를 잡아 타고 솔로역 근처의 로스맨을 찾아 나섰다. 새벽길을 달려 로스맨에
도착하였지만 만원이란다. 다시 다른 숙소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빈방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빈방은 없었다. 하기야 새벽에 무슨 방이
있겠는가.
다시 몇 곳을 전전했지만 숙소를 찾지 못하고 왕궁을 돌아 센츄럴 호텔까지 와서 물어보았지만 역시 빈방은 없었다. 할 수 없이 인력거를
보내고 어디서 차라도 한잔하고 숙소를 찾아 보려는데 신문을 배달하던 아이가 다가와 민박을 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를 따라 골목길에 접어들어 조금 들어가니 깨끗한 주택이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방이 있느냐고 물으니 방이
있다고 안내를 한다. 아주깨끗하고 가족처럼 지낼 수 있는 2층 방이었다.
옆방에는 네덜란드 여자가 묵고 있단다. 이집은 방 5개를 외국인에게 대여하고 있는 가족들이 운영하는 전형적인
민박(Home-stay)집이었다.
피로했던 터라 우선 샤워를 하고 한잠을 잔 뒤에 거리에 나가볼 참으로 방으로 돌아오는데 옆방의 네델란드 여자들이 일어나 세면을 하기
위해 층계를 내려오는데 팬티 차림에 가슴을 드러내놓고 사워장으로 오는게 아는가.
베낭 여행을 하다보면 비일비재한 일이지만 갑자기 맞닥뜨린 이들은 굉장한 거구들이었고, 매너가 없었다. 이 여자들은 나에게 물어오는
얘기도 고분고분 했지만 내가 알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냉담했던 것이다. 보통 여행자 끼리는 동병상린이라고 최대한으로 정보를 교환하는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들은 이날 방을 비우고 대신 독일 여자 둘이 우리 옆방에 들게 되었는데 독일 여자들은 상당히 친절하였고 서로가
많은 여행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다.
잠시 눈을 붙이고 나서 프란바난(Prambanan)으로 가기 위해 인력거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하여 들어가려는데 터미널 입장표를 내라고
한다.
우스운 일이 아닌가. 버스표를 사기 위해 터미널 안에 들어가는데 입장료라니 현지인들을 보니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나도 할수 없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밖에. 알고 보니 인도네시아에서는 터미널을 들어갈때마다 입장료를 내고 버스가 드나들때도 입장료를 내고 있었다.
직행으로 가는 버스가 없어 완행 버스를 탔다. 인도네시아 서민들의 발이다.
이 버스는 매 정류장마다 정차를 했고 가끔 기타를 든 청년이 올라와 노래를 부르고 손님들에게 적선을 해 가곤 했다.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 수준이 보통을 넘는 것이 아닌가. 듣기도 좋아 한곡 더 불러 달라고 하면 가끔은 불러주곤 했다. 이들은 외국인이 식사하는
식당에도 들려 기타 반주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완행 버스는 창문이 조그마하게 나있어 꽤 더웠다. 그나마도 현지인들은 창을 모두 닫고 있으니
갑갑하기 그지 없어 나는 창을 활짝 열어 놓으니 바람이 들어와 살것 같았다. 현지인들은 창을 닫아 달라고 한다. 알수 없는 일이다. 나는
더워서 못살겠으니 열어 놓자고 하니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드디어 프람바난 사원 입구에서 버스가 정차하고 버스에서 내리니 햇볕이 따가웠다. 프람바난 사원의 경내는 상당히 넓었고 사원과 사원을
다니는 차량도 있었다. 사원을 들어가는데 현지인과 외국인간의 입장료가 터무니 없이 차이가 났다. 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짠디로로(Candiloro)는 입구에 들어서자 높다랗게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로로 종그랑(Loro jonggrang)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홀로 사는 남자가 아름다운 처녀 로로 종그랑에 반해서 사랑하게
되었느나 처녀는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의 의미로 내일 아침 첫닭이 울때까지 1000개의 짠디를 만들어 준다면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남자는
온밤을 새며 열심히 짠디를 만들었다. 새벽이 가까워오자 사내는 구백 구십 구개의 짠디를 만들었다. 궁지에 몰린 처녀는 생각 끝에 큰 소리로
꼬끼오 하고 소리쳤다. 그로 인해 소원을 풀지 못한 사내는 나중에 처녀의 짓임을 알고 처녀에게 마술을 걸어 아름다운 처녀를 짠디로 바꾸어
버렸다. 1,000번째 짠디가 로로 종그랑이라는 것이다. 47m의 이 짠디는 슬픔을 띈 처녀의 모습같기도 했다.
프람바난 사원(Prambana--n)의 복원공사는 1937년 네덜란드 식민시대에 시작하여 20년후인 1957년에 현재의 탑이 복원되었고
지금도 주변의 사원을 복원하고 있었다. 넓은 경내에는 수 개의 짠디가 복원공사 중에 있고 맨 끝쪽에 있는 사원은 언뜻 보기엔 힌두 사원 같지만
이것은 불교 사원이었다. 경내 밖에는 많은 사원이 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 사원 밖의 조그만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솔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Solo의 Kraton
홈 스테이(Home-stay)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왕궁을 둘러 보기로 작정했다. 먼저 망구느가란 왕궁을 찾아 발길을 돌렸다.
이궁전(Kraton)은 백색의 높은 벽에 둘러 싸여 있으며 궁전 지붕의 선이 부드러웠다. 이궁전은 못을 하나도 쓰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궁전 회랑에는 가물란 음악을 연주할 악기들이 진열되어 있고, 매주 수요일
10시에 가물란을 공연한다고 한다. 이 왕궁에는 왕가의 후손이 살고 있고 그 일부가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특히 모든 벽에 거울을 붙인
여왕의 옷을 갈아입는 방과 사치스러운 장식도 볼수가 있다.
망구느가란 왕궁을 돌아보고 또 하나의 왕궁 수수하난 궁전을 가기위해 길가의 노인에게 길을 묻는데 마을 사람들이 나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친절히 대해준다.
차도 대접하고 고구마도 갖다주며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가라고 나를 이끌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이 밥과 찬을 더 갖다 주며 많이 먹으라고 권하며 식수까지 날라다 준다.
한국의 자상한할아버지를 연상시켰다. 여기서 먹은 그들의 스프(국)는 인도네시아 여행중에 먹어본 음식중에 가장 맛이있는 것이였다.
그들과 사진 몇장을 찍고 마을을 떠나려니 20여명의 마을 사람들은 솔로에 다시 오면 들리라고 마을 어귀에서 손을 흔들어 준다. 여행중에
맛보는 정겨운 모습이였다.
길을 재촉하여 인력거를 타고 수수후난 궁전(Kraton susuhunan)에 도착했다.
궁전 입구에서 들어가려 하니 근위병 같은 사람들이 제지하고 200m밖에 있는 사무실로 가라고 일러준다. 사무실에 들어가 입장료를 내고
대기하라고 해 기다리니 여자 안내원이 나와 궁전을 안내해 나갔다.
궁전의 외부에서 내부로 그리고 박물관을 상세히 설명했고 어느곳은 맨발로 들어가야 하는 절차를 거치며 안내원은 열심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이곳은 개별 관람이 아니라 안내원을 따라 그룹으로 관람하게 되어 있었다.
입구 주변의 경비는 솔로의 주민으로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옛 왕족에 대한 충성심이 아직도 존재하며 왕의 후예는 현재도 상당한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왕궁의 앞은 시장이 있는데 솔로 서민들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고 각종 과일과 잡화들이 거리 주변에 즐비하게 진열해서 팔고 있다.
우리네의 재래식 시장의 모습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과일 노점에서 흥정을 해가며 열대과일 맛을 보는 일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력거를 타고 숙소에 돌아오니 홈 스테이의
주인이 점심을 내다 주었다. 원래 아침만 주는 것인데 떠나려는 사람에게 점심을 먹고 가라고 음식을 내준다. 이집 아주머니는 나만 만나면
"커피"하고 내가 좋다면 언제나 커피를 날라다 주곤했던 친절한 사람이었다.
이 숙소는 세탁하기도 편리해 그간 밀렸던 세탁물을 전부 정리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는데 일본인 남녀가 숙박을 하기 위해 이집을 찾아
들었다. 이들은 내게 솔로의 여행 정보를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벌써 이 일본 여행자는 인력거를 타는데 4배의 요금을 주고 이곳까지 온 것을 알고 낙담을 하고 있었다. 숙소의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집앞을 나서니 골목길에서는 투계가 벌어지고 있었다. 동네 사람이 모여 싸움닭을 가지고 나와 돈을 걸고 내기를 하고 사람들은 소리치며
즐기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마을에서는 가끔 투계들의 싸움을 볼 수 있다.
인력거를 타고 솔로 버스 터미널에 와서 족자행 버스를 타려는데 직행 버스가 이곳에는 없어 할 수 없이 완행 버스를 타고 족자로 향했다.
혼잡한 버스는 더위와 함께 지루한 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베짜가 어우러진 마리오보로 거리(Jl.Maiorboro)
족자(Yogyakarta)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유객꾼이 호텔로 가자느니 자기차를 타라느니 하며 몰려 들었다. 요금을 물어 보니
엄청난 금액을 요구하여 그들을 뿌리치고 터미널 밖 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콜트를 향해 족자역을 가느냐고 물으니 빨리 타라고 손짓을 한다. 이
콜트를 타고 한참을 가다보니 온 시내를 다 돌아 다니고 있었다. 역으로 가느냐고 재차 물으니 그곳으로 간다고 한다. 1시간을 가도 역은
나타나지 않고 이 차는 어느 한가한 주택가에 멈추고 우리를 다른 차에 옮겨 타라고 한다.
잘못 탄 것이다. 바로 가는 노선을 타지 못하고 다시 차를 갈아타고 족자역에 도착하니 저녁 무렵이 다 되었다.
족자역 앞에는 외국 여행자들이 많이 머무르는 곳이어서 쉽게 깨끗한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식당도 서양 여행자들이 찾는 곳이 많아
식사를 하는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다.
저녁식사를 마친후 마리오보로 거리로 나섰다. 넓은 도로는 차량과 베짜가 어우러져 달리고 외국 여행자들이 저녁거리에 나와 쇼핑과 산책을
즐기고 있는 활기찬 거리였다. 상점과 백화점을 순회하며 시장 사람들과 접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거리에 나오니 베짜군들이 산책을 하라고
권한다.
베짜를 타고 족자의 거리를 산책하는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저녁은 서늘한데다 베짜를 타고 거리의 이곳저곳을 구경할 수 있거니와 공원과 바틱공방, 쇼핑지역, 주택등을 고루 안내해 주어 족자의
윤곽을 짐작하기에도 좋은 기회였다. 2시간 가까이 베짜를 타고 원래의 자리까지 오는데 우리돈으로 400원, 베짜꾼이 불상해 보이기까지 해
200원을 팁으로 주니 매우 고마워한다. 인도네시아의 인건비를 감안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호강을 해가며 여행을 한다는것은 서양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하리라.
숙소에 돌아오니 맞은편 방의 네델란드 여자여행자 4명은 호텔내의 유일한 동양인에게 호기심이 나는지 커피를 마시는 내게 다가와 이것
저것을 물어보지만 그들이 궁금해 하는것을 충분히 설명해 주기에는 내 언어 실력이 모자람을 어찌하랴.
한국의 경주 족자카르타(JogyaKarta)
자와(Jawa) 문화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족자의 거리를 걸어서 관광에 나섰다.
우선 메인 스트리트 마리오보로 거리를 걸었다. 주변은 각종 상점으로 즐비하고 베짜가 분주히 오가는 남국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외국
관광객이 거리에 가득하고 참으로 활기에 넘치는 거리다.
대통령궁을 지나면서 앞으로 왕궁이 보이고 그 길을 비켜 주택가를 지나가는데 한 의상실에서 예쁜 여자가 부른다. 의상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진을 찍어달란다.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다보면 사진 찍어 달라는 사람을 가끔 보게 되는데 우리의 관점으로는 납득이 잘 안되었다.
주택가를 계속해 나가니 새시장이 나타났다. 가게마다 열대의 각종 새들을 진열해 놓고 팔고 새장, 새먹이등을 파는데 그렇게 북적일 수가
없었다. 좁은 시장 골목을 돌며 진기한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새들을 좋아해 웬만한 집이면 수 마리의 새들을
가정에서 키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새시장에서 조그만 언덕의 성채를 넘어 물의 궁전(Taman Sari)으로 갔다. 동서고금을 통해 군주는 여자를 좋아했는가 보다.
이곳은 술탄이 왕궁의 궁녀들이 목욕할 수 있는 목욕탕을 만들어 놓았다. 요즘의 수영장 크기의 목욕탕을 건설하고 목욕탕 양쪽에 누각을 만들고 그
방에서 궁녀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군왕들의 호사스러움이리라.
누각의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방이 나오는데 이 방의 창에서 목욕탕을 내려다 보니 옛 군왕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 했다. 방안의
벽에는 각종 음탕스런 낙서와 그림들이 관광객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풀 주변에는 왕이 그날 밤에 함께 지낼 미녀를 선택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작은 창이 있는 방과 선택된 미녀가 치장을 했던 작은 방, 그리고 두 사람을 위한 방이 남아있다. 물의 궁전에서 주택가 언덕으로 가니 성채가
있고 성벽 밑에는 지하요새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을 빠져나오면 왕궁 남쪽으로 바틱 공방이 모여 있는 곳이다. 바틱 학교라는 곳을 가보니 어린 여자아이들이 열심히 천에 물감을
칠하며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어느 공방은 바틱 생산의 전 공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으며 실제 그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완성된
작품의 전시실은 화려한 각종 바틱이 진열되어 있는데 유명한 작가가 수제품으로 만든것은 무척 비싼 값이여서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바틱은
섬세하고도 끈기가 필요한 작업으로 묵묵히 계속하는 모습은 일종의 감동을 느끼게 한다. 천에 녹은 밀납으로 선을 그려가는 멋진 솜씨는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왕궁은 바틱 거리에서 지척에 있다. 족자 카르타를 오랫동안 통치해온 왕후가 살았던 왕궁이다. 왕궁의 응접실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레스
글라스 천정에 매달린 램프를 보면서 왕들의 권세를 엿볼 수 있다.
끄라똔은 1756년에 건설된 것으로 최근까지 족자카르타 특별지구 지사인 술탄 하멘끄 보오노 9세가 살고 있었다. 이곳은 자와 전통
민속의상을 입은 노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왕궁을 지키는 무사로 칼을 차고 있다. 왕궁의 충실한 병사이며 무보수로 왕궁을 보호하고 안내를 맡고
있는 것이 이들이다.
마리오보로 거리로 나와 여행 안내소에서 내일 새벽에 출발하는 보로브드로 관광 신청을 하고 저녁시간을 2시간 공연하는 라마이나 발레를
구경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보로브드로(Borobudur)
새벽 4시에 일어나 여행 안내소로 나갔다. 약속된 시간이 되었는데도 차가 오지를 않았다. 안내소 문을 두드려 왜 차가 오지 않느냐고
하니 차가 이곳을 들르지 않고 떠난 것 이라한다.
안내소에서는 급히 차를 수배해 나를 싣고 보로브드로로 굉장한 속력을 내며 달렸다. 새벽 바람이 추위를 느끼게 한다.
1시간여 만에 보로 브드로에 도착했다. 보로브드로는 불교의 사원이다.
AD 8세기경에 건조되어 샤일렌드라 왕조의 쇠망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불교 건축이긴 하지만 본고장인 인도의 양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수수께끼가 많은 유적이다. 이 유적의 이름, 건립자, 설계자, 건립한해 어느것 하나 학술적으로 완전한 형태로 해명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10세기의 긴세월에 걸쳐 흙속에 파묻혀 있다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보인것이 170년에 불과하다.
각국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자와에서 말레이 반도까지 그 세력을 신장시킨 샤일렌드라(Syailendra) 왕조가 8세기 말기에 착공
9세기 중순에 완성 시켰다고 전해진다. 약 70년의 긴세월을 들여 이 거대한 건축물을 완성한 셈이다. 아무튼 인도네시아 관광의 하이라이트가
보로브드로 사원과 프람바난 사원을 중심으로한 사원 순례일 것이다.
자와의 정신 문화와 예술의 진수는 인도네시아가 세계에 자랑하는 역사적 문화 유산이다. 보로브드로 사원 건조의 재료가 된 바위는
므라삐산의 분화로 생긴것을 사용하였으며 바위의 수가 100만개 이상에 달한다.
하늘을 찌르는 초고층 빌딩을 만드는 현대인이기는 하지만 천년이상이나 오래전에 사용된 이 공법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회랑을 돌아
가파른 돌계단을 다시 올라가서 3층으로 된 원단에 나가면 눈앞에 대 스뚜빠가 나타난다. 종 모양의 스뚜빠가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고 이
스뚜빠마다 속에는 부처가 안치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스뚜빠 속으로 손을 넣어 불상을 만지면 소원을 풀 수 있다고 해서 어떻게 하든
행복을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팔을 뻗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사원은 땅속에 묻혀 있다가 천년후 당시 통치자인 영국의 레풀즈가 밀림속에서 발굴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고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각국의
협력으로 10년만에 복원되었다. 박물관에 들리면 발굴당시 사진과 복원 경과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물을 진열해 놓았다.
보로브드로 사원을 구경하고 주변에 있는 믄듯 사원, 빠원 사원을 들렸지만 엄청나고 장엄한 보로브드로에 압도되어서인지 다른 사원들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보로브드로 일대를 돌아보고 차는 다시 마리오보로 거리로 되돌아왔다.
천상의 나라 디엔 고원(Dien platean)
족자 버스터미널에서 디엔을 가기위해 마그랑(Magelang)까지 가서 다시 워노소보행 버스를 갈아탔다. 점차 고도가 높아지고 주변은
끝간데 없이 담배밭이 전개된다. 구릉지의 어느곳이나 담배밭이고 작은 마을 사람들은 담배잎을 수확하여 공판장 같은 곳에 모여 위탁하는것
같다.
몇시간을 달려가도 담배 농사의풍경이 펼쳐지고 작은 마을은 회교 사원이 들어서 있다. 지나는 마을마다 동네 청년들이 축구를 즐기는데
축구 시합이 있는 마을은 마을 사람들이 거의 축구장에 나와 구경을 하고 있다. 축구장이라야 추수를 한 넓은 밭에서 하는것이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국민들인가 보다.
워노소보에 도착하자 식사도 할 겨를없이 콜트터미널에서 차를 바꾸어 타고 20분을 가서 다시 다른 차로 바꾸어 타야만 했다. 바로
이차가 디엔 고원까지 가는 마지막 콜트이다. 얼마나 사람을 태우는지 앉은 사람의 무릎에도 사람들이 앉으니 견디기 힘들다. 원주민들은 내가
외국인이라 내 무릎에는 앉으려 하지 않았지만 고물차는 실은 수 있는 만큼의 짐과 사람을 싣고 경사가 급한 산위를 힘들게 출발했다. 이 차가 이
산길을 갈 수 있을까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를 달려 이 위에는 촌락이 없을것 같았지만 이 산벼랑에도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계단식 농엽을 하고 있었다.
저녁놀이 기웃한 즈음에 마지막 고개를 넘으니 커다란 분지가 나타났다.
한가로운 농촌 풍경이 해발 2,000m 산정에 펼쳐졌다. 차는 로스멘 앞에 정차했고 베낭을 메고 로스멘에 숙소를 정했다. 디엔
고원에는 숙소가 2개밖에 없었고 모두 외국인 여행자가 이용하고 있었다.
어두워지자 추워지기 시작했다. 숙소는 허름했고 담요 두장을 가지고 밤을 지내야 할 판이다. 저녁을 먹고 방에 있으니 한심한
느낌이다. 더우기 이곳까지 오면서 점심도 먹지 못하고 강행군을 하지 않았는가.
방에 있기가 심란하여 식당에 가보니 서양 여행자들이 거의 이 식당에 모여 있었다. 커피를 들면서 추위를 이겨보려 애쓰다 추위속에서
고원의 하루밤을 불면속에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니 추위가 여전했지만 햇살이 들면서 아주 상쾌한 일기다. 이곳은 힌두가 이슬람에 쫓기면서 고원지대로 옮겨와 힌두의
성지로서 신앙의 중심이 되었었다. 이슬람에 의해 폐허가 되어 몇개의 사원만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디엔고원의 전경은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다.
유적지는 산책을 하며 돌아보기에 적당했다. 관광국에서 지도를 입수하고 빤다 사원군(Complex of Pandawa Temples)으로
걸었다. 이 사원은 고원의 한가운데 있으며 다섯개의 짠디가 있다. 모두가 아담한 사원이고 자와 최고의 유적이라 한다.
여기서 길을 따라 걸으면 가뚜가자 사원이 나타난다.
잘 보존된 유적이다. 옆에는 박물관이 있는데 입구에서 방명록에 서명을 하니 돈을 달란다.
할수 없이 100루피를 주고 방명록을 살펴보니 많은 방문자 중에 한국인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다시 길을 따라 국민학교를 지나 마을에
다다르는데 현지인들의 소박한 삶을 볼 수 있다.
이 마을을 빠져 나가면 비마 사원이 있다.
비마 사원(Can--di Bima)에서 오른쪽으로 산길을 걸어가면 시끼당 지열지대(Kawah Sikidang)가 나온다.
여기 저기서 흙탕 온수가 끓어 오르는것이 장관이다. 이곳을 보고 다시 오던길을 되돌아와서 동쪽길로 접어들면 힌두 승려가 수행했던
동굴이 나오는데 주변은 와르나 호수와 뽕일론 호수가 있는데 호수의 물 빛깔이 이처럼 푸르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디엔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여기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꽃밭이 있고 현지인들의 들에서 수확하는 모습과 마을에서 그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산책에 소요되는
시간은 3-4시간이 걸린다. 숙소에서 짐을 찾아 메고 다음 여행지인 수라바야로 가기 위해선 천상 족자까지 다시 돌아가야 하는 먼길이다.
서둘러 워노소보행 콜트에 몸을 실었다.
제 2의 도시 수라바야(sura Baya)
점심도 먹지 못한채 4번의 차를 갈아타며 족자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깃든 저녁이었다. 점심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의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지라, 허기를 채우는데 급급했다. 족자카르타 역에 나와 새벽 1시에 떠나는 열차를 예약하고 베낭을 락카 룸에 맡겨 두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리오보로 거리를 산책하며 쇼핑을 하고 거리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밤시간을 보내고 역으로 돌아와 수라바야행 기차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아침 7시 30분 수라바야 역에 기차는 멈추었고 베낭을 메고 역사에서 락카룸을 찾아 베낭을 맡겼다.
역사 밖으로 나오니 유격꾼들이 모여들고 번화한 아침 거리에 행선지를 가늠하느라 어리둥절 했다.
수라바야는 동자와주의 수도로 자카르타 다음가는 인도네시아의 제 2의 도시다. 인구 밀도도 가장 높고 쌀 생산량이 전국의 3분의
1가까이 생산하는 곡창지대다. 주내에는 신비한 산으로 알려진 보르모산, 화산활동이 계속되는 스메르 산, 라운산, 그리고 자와섬에서 제일 높은
마하멜 산들이 있다.
수라바야는 상업도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천연의 항구 딴중 삐락 항은 국제 무역항이며 제 2차 세계대전 때부터 군항으로 사용되기
시작해 현재도 해군의 주요 군항이 되어 있다.
역사에서 길을 건너 한 빌딩의 경비원에게 동물원 가는길을 물으니 지도까지 그려주며 상세히 알려준다.
동물원까지 이동하여 동물원 앞에 있는 식당에서 음식의 맛이 없는 형편없는 아침식사를 했다. 이것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실수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후 저녁까지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물원에 들어가서 그리 큰 동물원은 아니였으나 나는 단하나 코모도(Komodo) 도마뱀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다. 코모도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도마뱀은 마치 작은 공룡과 같았다. 어떤 놈은 저희들끼리 싸웠는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걸어가는 모습은 느렸고 그
뒤로는 꼬리가 끌려 길게 자국을 땅위에 남기곤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도마뱀이였다. 생존하는 세계 최대의 도마뱀이다. 소순다 열도의
코모도섬에 가면 이 도마뱀이 자연 상태에서 서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다. 동물원을 돌아보고 수라바야 역에서 베낭을 찾아 보르모 산을 가기위해
조요보요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신비롭고 성스러운 보르모 산(Gnung Bromo)
조요보요 버스터미널(Joyoboyo Bus Terminal)에서 쁘로볼링고(Proboling-go)행 버스를 타고 3시간 정도 달리니
쁘로볼링고 였다. 여기서 응아사다리행 콜트를 타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달려와 정기 콜트는 없고 여행사에서 떠나는 버스 밖에 없다고 한다.
분명히 정기 노선이 있을 터인데 현지 사람들의 교통편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여행사 버스는 값이 비싸고 사람들은 가는 차편이
없다고 한다. 외국인에 대한 속임수가 분명했다.
터미널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가 지나가는 현지인에게 보르모로 가는 콜트를 어느곳에서 타느냐고 물으니 길건너에 있다고 알려준다.
짐작한대로 였다.
이 콜트는 12명 정원인데 20명이 넘는 인원을 태우고 지붕에는 짐을 가득 올려 실었다. 나는 처음 운전석 옆에 두사람이 타는 곳에
앉아 출발했으나 중간에 현지 여자를 앞자리에 또 태우니 자리가 좁아 결국 내 허벅지 위에 걸터 앉은 신세가 되었다. 처음은 괜챦은것 같았다.
현지인들도 웃으면서 좋지 않느냐고 농을 걸어온다.
얼마간 견딜만 했다. 형편없는 산길을 구비구비 돌아가는데 몸이 쑤시기 시작했고 점심을 먹지 못하고 피곤한 터라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앞에 앉은 여자는 미안해 어쩔 줄을 모른다. 얼마만에 뒷자석 사람이 중간에 내리고 여자를 뒤로 태우니 살맛이 난다. 덜컹거리는 차에
허벅지에 여자를 올려 놓았으니 내 왼쪽 다리는 고생깨나 했다.
쁘로 볼링고(Proboling-go)에서 응아사다리(Ngadisari)까지의 여정은 정말 멋이 있다. 산으로 올라갈 수록 경관이 넓게
트이고 고도가 높아질 수록 식물의 식생도 변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길가의 현지인 탱글족들의 사는 모습도 볼 수 있는 흥미있는
여행이었다.
탱글족은 힌두신앙을 믿고 있다. 14세기에 이슬람교가 자와섬을 점령했을 때도 이들은 힌두신앙을 지킨 산악민족이다.
응아사다리 마을 입구에는 2개의 5층탑으로 된 게이트가 있고 다른지역과 다른 느낌을 준다. 게이트 옆에 있는 사무실에 등산료를
지불하고 보르모산을 숙소에서 직접 볼 수 있는 제일 뒤에 있는 숙소(CEMARA INDAH TOTEL)를 잡았다. 해가 지는 보르모의 전경은
하루종일 굶고 온 나에게 경이로움 뿐이였다. 어떻게 이 신비로운 산을 설명해야 좋을까.
사진을 찍으려니 먼저 와 있는 외국 여행자가 셔터를 눌러주는 친절을 베푼다. 숙소에 딸린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더운 샤워를 하니
기분이 개운해진다. 호텔 사무실에서 내일 보르모산(Gnung Brono)까지 타고 갈 말을 예약하고 식당에서 서양 여행자들과 어울렸다.
보르모의 밤은 추웠다.
새벽 4시에 깨우는 노크소리를 듣고 급히 일어나 식당으로 나가 간단한 요기를 하고 탱글족의 마부들이 이끄는 말을 타고 산의 정상을 항해
출발했다.
깜깜한 밤에 춥기도 하고 조랑말은 기우뚱거리며 중심이 잘 안잡힌다. 보르모 정상 까지는 5Km 도보로 1시간 반이면 도착된다.
도중에는 후레쉬를 켜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더러는 무리지어 정상을 향해 걷고 있다.
분화구를 건너 보르모산(MT.Bron-o)의 밑에 오니 벌써 많은 사람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우측으로는 신비롭게 생긴
바뚝산(MT.Batok)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달에 온 느낌을 준다.
분화구 안은 사막이고 달속의 사막을 걸어가는 느낌이 든다. 사막에 하얀 돌들이 늘어서 있다. 이것이 보르모산으로 가는 표적이어서 혼자
밤에 간다해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꿈속같은 달 세계를 걸어 산의 계단 밑에 이르러 275단의 수직 계단을 오르면 산의 정상이다. 하늘을 보면 쏟아질것만 같은 별들이
하늘에 가득하다.
산의 정상은 수백명의 외국인이 일출(Sunrise)을 보기 위해 추위를 이기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분화구 안에서는 굉음을 내며
화염을 내뿜고 주위는 온통 유황 냄새로 가득하다.
어떤이는 동쪽을 향해 기도하는 이들도 있다. 한참 후에야 동쪽 하늘이 붉어지며 붉은 해가 솟아 오르고 있다. 이곳의 일출은
구름위에서 솟아 오르는데 화산에서 보는 이모습은 신비롭기 그지 없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주변이 환해졌는데도 수백의 사람들은 자리를 뜰 줄 모른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나도 하루를 달려오지
않았던가.
보르모의 장엄한 드라마는 순식간에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더 아쉬운지 모르겠다. 일출을 본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던 길로 되돌아
갔으나 나는 분화구를 돌아보기로 했다.
새삼스럽게 보르모 전체의 규모를 알 수 있었다. 응아사다리로 돌아가는 길은 탱글족 마부들의 소박한 생활을 볼 수 있는 즐거운
산책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발리로 떠날 차편을 구했다. 다른 외국 여행자와 같이 우리나라의 봉고 같은 차를 타고
쁘로볼링고까지 나와 직행으로 발리까지 가는 버스를 탔는데 이 버스로 비뉴왕기에서 잠시 기다려 페리에 버스를 싣고 발리섬에 도착하게 되어 이
버스가 발리의 덴샤파르까지 가게 되어 있었다.
보르모에서 덴샤파르(Denpasar)까지 오는 도중 내내 식사를 하지 못하고 땅콩 한봉지로 요기를 대신 해야만 했다. 덴샤파르
터미널에서 꾸타 비치로 가는 콜트를 타려고 하니 요금이 비싸 이곳 저곳 알아본 후에 차를 타고 구타에 도착한 시간은 밤 8시가 되어서
였다.
우선 깨끗한 식당에 들어가 시장도 하여 큼직한 바다고기를 선택하여 훈제 요리를 해서 푸짐한 식사를 하고 비치에서 200m 떨어진 거리의
로스멘에 여장을 풀었다.
지상 최후의 낙원 Bali
인도네시아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반면 독특한 힌두문화를 발전시킨 곳이 발리다. 마을 집회소에 보이는 사람은 신들을 위해 춤을
추고 집앞의 사당이나 길바닥에는 날마다 빠짐없이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 놓여진다.
이들은 신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발리도 최근에 눈부신 관광화에 빛을 잃어 간다는 말들이 있지만 꾸타비치에 모이는 반나의
해수욕객이나 돈많은 여행자로 또 다른 발리를 만끽하고 있다.
신들의 섬 발리, 축제와 예술의 섬, 휴양지로서의 발리, 어느것이나 발리의 일부분일 것이다.
인도네시아 중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가장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기 쉬움에도 가장 발리다운 옛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발리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어제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돌아와 밀린 빨래를 해 마당 건조대에 널어 놓고 비치를 향했다.
쿠타의 비치는 파도타기에 최적의 해변이었다. 백사장 가운데 큰 고목 나무밑에 자리를 잡고 바다로 뛰어 들었다.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띄우면 또 다른 파도가 파상적으로 몰려오곤 했다. 지루하지 않는 파도타기였다.
비취 백사장에는 서양 여행자들이 가슴을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즐기는것이 동양인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지리라.
더우기 우리 앞에서 알몸으로 옷을 갈아 입는 장면은 볼상스러운 일도 아닐 수 없었다.
백사장에서 한잠을 자고 일어나니 일본여자가 와서 한국인이냐 말을 걸어온다. 서양 여행자 속에서 우리 동양인은 자연 친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준꼬라는 국민학교 선생은 발리에서만 12일 일정으로 왔단다. 주로 한국과 일본의 학교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꾸타와 레간의 비치는 언제나 즐거운 분위기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여행자로 모두가 비취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저녁,
소란스럽던 장사꾼과 마사지 아주머니들이 돌아갈 무렵이면 푸른색의 바다도 붉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수면에 가라앉는 태양은 불꽃같이 느껴지고
바닷가를 걸어가는 연인들은 한폭의 그림과 같다.
호텔의 야외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꾸타의 거리를 돌며 약간의 쇼핑을 하고 가루다(Garuda)호텔 커피숖에서 발리 커피를
음미했다.
준꼬 선생
모처럼 이번 여행중 늦잠을 잤다. 오늘 하루의 계획은 해수욕 뿐이다.
아침겸 점심식사를 하고 여행사에 들려 롬복(Rombok)으로 떠나는 페리를 예약하고 가루다 항공사를 찾아가 귀국할 비행의 예약을 끝내고
비치로 나갔다.
나무밑의 모래밭에 자리를 마련하고 있으니 어제 만났던 준꼬 선생이 인사를 한다. 언제 발리를 떠나 귀국하느냐고 물으니 앞으로 4일후에
귀국한단다.
나의 여행일정을 물어 내일 아침에 배편으로 롬복으로 떠날 거라고 하니 저녁 쇼핑을 끝내고 만나자고 한다. 흔쾌히 약속하고 하루 종일을
파도타기를 했다. 마사지 아주머니 성화에 못이겨 마사지도 하고 열대 과일도 사먹으며 모처럼 한가로운 하루를 보냈다.
오후 늦게 준꼬 선생이 자리를 뜨며 호텔로 들어가겠단다. 몇시에 어디로 나오면 되겠느냐고 묻는데 막상 장소 선택은 쉽게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좋은 음식점이 생각났지만 간판을 모르니 난감하다. 준꼬 선생에게 어디가 좋겠느냐고 물으니 나에게 정하라고 한다. 엉겁결에
여기서 만나자고 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며 떠나갔다. 나도 짐을 챙겨 숙소로 돌아오며 곰곰히 생각해 보니 보통의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외국인과 만나는 국제적인 약속인데 어두운 밤 비치의 모래밭 고목 나무 밑에서 그것도 여자에게 만나자고 했으니 말이나 되는 일이겠는가.
이 비취에는 밤에 가로등도 없는 곳인데 가까운 곳에 가루다 인도네시아 호텔 커피숖도 있으련만 생각할 수록 멍청한 짓이였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대강 베낭에 정리했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 떠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저녁식사를 한다음 레간 거리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준꼬 선생과 약속한 비치로 나갔다. 백사장은 캄캄했다. 고목나무 주변에 의자가 있어 앉아 있으려니 파도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느낌이 든다. 이 캄캄한 밤에 일본 여선생은 올것 같지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약속장소를 이런곳으로
정했다니 급작스런 일이기도 했거니와 상호 언어의 구사에 많은 어려움도 없지 않았지만 오늘의 약속은 낭패일 수 밖에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약속시간 30분이 지나도 준꼬 선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발길을 돌려 레간거리에 나가 쇼핑이라도 할 양으로 비치를 벗어나 가루다 호텔 앞을 지나는데 "하이"하며 준꼬 선생이 손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약속시간에 맞추어 나왔으나 비치쪽으로 불빛도 없고 무서워서 가지 못하고 비취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말에 머리 나쁜놈 만나면 여럿 고생한다더니 바로 그 꼴이었다.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결국 주변의 식당으로
향했다.
맥주를 시키고 안주와 술이 나오자마자 내 잔에 술을 가득 부어준다. 술은 여자가 따라야 술맛이 난다고 했는데 술잔을 비우면 곧 바로
술을 따라 놓는다. 얼마만에 물으니 일본에서는 술좌석에서 남자와 함께 했을때는 술은 여자가 따르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그렇지
않느냐며 미안해 한다. 한국에서도 꼭 술을 따르는 법은 없지만 술을 따라 주기도 한다고 말해주었다. 이 여자는 습관이어서인지 자리를 뜰때까지
내 잔만 비면 계속 술을 따르곤 했다. 12시가 되어 일어나려니 여선생이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하며 술값을 지불했다. 내가 나오며 2차를
사겠다고 하니 흔쾌히 응락하고 그녀가 묵는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술에 약한 나로선 그녀를 당할 수 없었으나 그에게 얻어먹고 헤어질 수
없어 2시까지 그 자리를 버티는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었다. 2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의 즐거운 여행을 빌어주며 작별을 하였다.
오염 되지 않은 자연과 사람들이 있는곳
전날 맥주가 과한 탓이리라. 아침 일찍 일어나 롬복(Lombok)행 페리를 타러 나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나자 여행사 차량의 운전수가 빨리 떠나야 된다고 소리친다. 숙소앞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는데 내가 보이지 않으니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황급히 일어나 베낭을 들고 차에 올랐다. 차는 새벽 꾸타 해변을 돌아 빠당바이 항구에 도착했다. 내가 타고 가는 배는 쾌속 페리로서
잘 꾸며진 배였다.
항해 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 롬복섬은 소순다 열도의 최서단에 있고 발리섬과 비슷한 크기이다. 서부지방에는 발리에서 이주한 사람이
많고 남부에는 원주민인 사사크족이 많이 살고있다.
북부에는 탄자니산(3,726m)이 솟아 있고, 정상 가까이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롬복(Lombok)섬에 도착한 항구 암빼난항에서
새로이 개발되어 서구인에게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셍기기(Sengigi)로 향했다. 버스에는 전부 서양 여행자 동양 얼굴을 한 사람은 맨
앞자리의 젊은 여자 둘뿐인데 국적이 어딘지 모르겠다. 한 시간 반가량 달려 도착한 버스는 호텔마다 들리며 손님을 내려 놓는데 나로선 일급
호텔에 묵을 수 없는 처지에 이곳은 어느 안내서에도 소개된것이 없는터라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버스로 계속 일급 호텔만을 순회하여 어디선가 내려야 겠는데 적당한 곳이 없다. 몇개의 호텔을 순회한 버스가 큰길로 나오자 앞자리의
동양 여자가 내리는것을 보고 나도 따라 내렸다. 그들도 숙소를 찾고 있었다. 일본인인줄 알았는데 현지 인도네시아 여자들 이었다.
인포메이션에 가서 숙소를 문의하니 만원이라고 한다. 우선 점심부터 먹고 보자.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시켜놓고 식당에 있는
현지인에게 숙소를문의하니 몇곳에 전화를 걸어보고 모두 만원이라 한다. 근심을 하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버스에 함께 타고왔던 인도네시아 여자들이
식당을 앞을 지나가는걸 보고 뛰어나가 불렀다. 숙소를 구했느냐고 물으니 정했다고 한다. 내게 아직 숙소를 못구했느냐고 반문한다. 고개를
끄덕이니 자기가 알아보겠다고 하며 자기가 묵을 호텔에 전화를 하더니 숙소가 있다고 함께 가자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그 여자를 따라 아스티티 호텔(Astiti hotel)로 가서 가까스로 하나 남은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짐을 풀어놓고 길건너에 있는 셍기기 비치로 나갔다. 이 해변은 발리처럼 크지 않았지만 상업화에 물들지 않은 조용한 비치였다.
동양인이라고는 나 혼자이고 여행자들도 한가로운 가운데 썬팅을 하며 오수를 즐기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사람들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해수욕을 즐기고 멀리 낚시질하는 원주민이
눈에 띄어 그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바다를 걸어 가는데 낚시를 하는 사람까지 가는 길은 물이 종아리쯤 밖에 차지 않았고, 파도는 주기적으로
몰려왔다.
바다안으로 300m정도 들어가도 무릎 이상은 차지 않는 곳에서 사사크족 노인이 이상한 바다 낚시를 하고 있었다. 주변의 바위에는 맑은
물속에 산호들이 아름답게 비치는 아름다운 해안이었다. 사사크족 노인은 내 국적을 묻는다. 한국이라고 하니 남쪽이냐 북쪽이냐 재차 되묻는다.
남쪽에서 왔다고 하니 서울 코리아! 하며 악수를 청한다. 소순도 열도의 어부에게도 이젠 한국은 낯설지 않은 나라임에 틀림없다.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 주기도 하며 주머니에서 비스켓을 꺼내 주기도 한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비치에 돌아와 각국의 서양
여행자와 어울리는데 스페인에서 온 가슴에 털이 많은 친구는 나보고 롬복섬안에 유일한 한국인이라고 말한다. 하긴 호텔에서도 처음 맞는
한국인이라고 환대하지 않았던가!
조용하고 정취있는 해변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고 숙소에 돌아와 문을 여는데 메모지 한장이 문틈에서 떨어진다.
메모지를 펴보니 인도네시아 여자들이 보낸 것이다. 내일 롬복섬 북쪽에 있는 겔리마녹이란 섬으로 스킨 스쿠버를 하기 위해 떠나는데
동행하게 되면 요금도 싸게 되니 함께 갈 의향이 있으면 자기네 방으로 연락해 달라는 내용이였다.
Lombok에서 만난 Miss Ping-Ping
Ping-Ping과 내일 겔리마녹(Gilimeno island)을 떠나기로 의기투합했다. 이 여자들은 말이 빠르고 영어가
유창하다.
영어를 매우 잘한다고 하니 자기는 카나다 토론토에서 대학을 다니고 지금은 수라바야의 외국인 회사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저녁에 계획이 있느냐고 물어 없다고 하니 이곳에 디스코텍이 있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동의를 구했다.
소순다 열도에 까지 와서 이런 행운이 있다니 ? 응락하고 저녁식사후에 만나기로 했다.
약속시간에 호텔 앞에서 기다리니 핑핑과 안줄라가 없어 그들의 방을 찾아가 두드리니 이들은 여행자의 복장이 아니라 무도회에 나가는
모습처럼 보였다. 내 복장은 슬립퍼에 반바지, 티셔츠차림이라 괜찮겠느냐고 물으니 아무 염려가 없다고 안심시킨다. 도로를 따라 한참
걸었다.
주변은 깜깜하고 하늘은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디스코텍이 있을것 같지 않았으나 조금더 걸어가니 음악소리가 나고 불빛이 휘황찬란한 곳이
우리가 찾는 곳이었다.
히피 스타일의 벤드맨들이 노래와 음악을 연주하고 많은 외국 여행자들이 밤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종업원의 안내로 자리를 잡고 맥주를
시키고 핑핑과 안줄라는 콜라를 주문했다. 이들은 술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술을 여자가 하는것은 사회 통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보다. 맥주를 따라서 마시려니까 술 맛이 날것 같지 않아
한국에서는 술자리에서 여자가 술을 따라주는 것이 예의라고 하니 인도네시아에서는 스스로 따라 마신다고 대답하며 나는 한국사람이니까 자기들이 따라
주겠단다.
업드려 절받기지만 혼자 따라먹는 것보다 따라주는 술이 더 나을것 같았다.
이 여자들은 외국에서 공부했던 탓인지 최신 유행 팝도 잘 불렀고 춤도 아주 잘 추었다. 어찌나 춤을 추어 대는지 그들을 상대하는
나로선 힘들어 자리에 돌아와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12시가 되어서야 밴드음악이 끝나고 우리는 이곳을 나와 어두운 도로를 따라 숙소로 향했다.
오염이 되지 않은 적도하의 하늘은 별무리도 장관을 이루고 있었고 이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은 히말리아에서 본 이래 처음인
것이다.
롬복은 이번 여행에 계획이 없었으나 보르보 화산에서 만났던 인도네시아인이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오게 되었고 또 우연히 현지 여성들의
제의로 길리섬으로 가게된 것이다.
내일 계획을 약속하고 롬복의 첫밤을 보냈다.
산호섬 Gilimeno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도로 옆에 있는 여행사로 나가니 우리를 싣고 갈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양 여행객들이 모여들어 버스를 북쪽을 향해 1시간 30분간을 달려 조그마한 부두에 닿았다.
여기서 여행객들은 각기 자기가 목적했던 배들을 타고 떠나가고 우리는 조금 기다리니 한 젊은 친구가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하며 작은배에
오른다.
핑핑과 함께 배에 오르니 배는 맑은 바다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이 배는 오늘 하루를 우리가 사용하는 배가 되는 것이다. 배는 롬복섬 북단에 4개의 작은섬이 있는데 그중 최남단에 있는 섬에 닿았다.
그곳에도 각종 투어 사무실이 있고 해양 스포츠의 물품 대여와 교육 그리고 안내를 맡아 주고 그 주변에는 여행자들이 묵을 수 있는 방갈로가
숲속에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스킨 스쿠버 장비를 주고 낮은 바다에서 바다밑을 살피는 연습이 시작되었다. 해안에서 10여보 밖에 되지 않은 곳인데도
아름다운 색깔의 고기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이 황홀했고 지루한줄 모르고 바다밑을 탐색했다.
두시간 가량 자유롭게 연습을 하고 다시 배를 타고 3번째 섬의 중간 지점에 와서 배를 세우고 배의 밑바닥 나무 판자를 들추니 배 바닥은
유리로 되어 있고 그곳으로 바다밑의 형형색색의 산호가 빈틈없이 서식하고 있는것이 보인다.
이곳에서의 스킨 스쿠버는 산호와 열대어가 어울어진 장관을 볼수 있었다.
두시간여 바다속을 구경하고 나니 지칠대로 지쳐 배를 몰아 3번째의 겔리마녹 섬에 상륙하였다.
제번 큰 방갈로 군이 형성되어 있고 잘 꾸며진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했다. 핑핑양은 현지 과일을 파는 아낙네에게서 이상한 과일을 사서
먹는 방법을 설명하고 내게 건내주곤 했다.
방갈로 주변을 돌아보고 오니 핑핑양은 현지에서 운행하는 마차를 타라고 손짓한다. 핑핑이 싸게 협상하여 섬 일주를 시켜주겠다고
한다.
마차로 섬 일주 도로를 달렸으나 얼마가지 않아 모래밭을 지나야 하므로 조랑말은 힘겨워 쩔쩔매고 마부는 말을 끌고 뛰는 모습을 보니
애처럽기까지 했다.
섬주위로 아름답게 꾸며진 방갈로가 야자수 숲속에 자리잡은 섬의 풍경은 휴양지로서 해양 스포츠의 메카로서 최적의 장소였으며 이곳이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외국인으로 부터 돈을 벌고자 하는 현지인들은 차츰 개발의 삽질이 더 거세어져 감을 볼수
있었다.
다시 배를 타고 겔리마녹을 출발해 롬복을 향했다. 뒤로 하는 겔리마녹의섬들은 꿈과 같은 곳임을 절감할수 있었다.
출발했던 부두에 내려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이동하려니 어린아이들이 내 발에 흙을 묻혀 놓고는 병에 들은 물로 씻어 주고는 돈을
달란다. 현지아이들이 그냥 구걸을 하지않고 백사장 모래가 묻은 발에 물을 부어주고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100루피(40원)를 주니
싱글싱글 웃으며 떠나간다.
버스를 타고 셍기기 숙소로 돌아오니 저녁이다. 핑핑은 저녁후에 다른곳에 디스코 카페가 있다며 같이 가자고 한다. 저녁을 먹고 핑핑과
안줄라와 함께 디스코 카페로 갔다. 이곳은 어제 갔던 곳과 달리 아래층 가운데 홀이 있고 그 주변에 좌석이 있고 1층은 모두 손님 좌석이
꾸며져 있고 2층에서는 춤을 추는 장면과 노래하는 가수를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인도네시아 여자들은 오늘도 콜라 한잔으로 버티고 나는 맥주로 했다. 한참 얘기하는 도중 옆자리에 예쁘장한 여자 아이가 자리하고 앉자
내게 인사를 하며 코리안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는 일본에서 왔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여행중 동양인은 일본사람 뿐이였는데 이곳 롬복에선 일본사람도 보이지 않
으니 이 일본아이도 한국사람을 보는것 만으로도 반가운 모양이다. 12시가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내일은 발리로 돌아가야 한다.
Peliatan의 Bangalows
서둘러 베낭을 메고 도로변의 여행사에 나와 차를 기다렸다. 다른 여행자들도 모여들기 시작했고 버스가 도착하자 버스에 자리하고
출발하려는데 어제본 일본 여자 아이가 뛰어 오고 있었다.
분명 이차를 타려고 오는것 같아 운전기사에게 버스를 멈추게 했다. 이 여자는 헐레벌떡 차를 오르며 나를 보자 인사를 한다.
함참 만에 롬복항에 도착하여 배에 오르고 나는 갑판에 자리를 잡고 눈을 붙였다. 한참 잠을 자는데 누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일어나
보니 일본 여자아이가 커피를 가져와서 권한다. 함께 차를 마시며 혼자 여행하느냐고 물으니 자기 남자친구가 발리에 있고 롬복에 오고 싶어 혼자
왔다가는 것이라 한다.
대학 2학년이라는 이 아이는 고등학생 같아 보였다.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이 학생은 나를 볼때마다 인사를 공손히 잘했다는 것이 인상에
남는 사람이다.
배는 빠당바이 항에 정박했고 부두를 나와 조금 기다리니 우붓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롬복 숙소에서 우붓까지 가는 모든 교통편은
여행사에서 지불한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였다.
발리의 중부 우붓에 도착하여 숙소를 찾아 다녔으나 모두 만원이고 빈방이 없었다. 한곳에 시설이 좋은 곳을 가니 너무 비싸 묵을 수
없는 처지라서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로 하고 베낭을 메고 북쪽을 향해 걸었다.
호텔이 있길래 그곳에 들리니 역시 방은 없고 종업원이 한곳을 소개해 주었다. 조금 기다리는데 차가 한대 와서 그것을 타고 가니 그곳은
우붓(Ubud)이 아니고 건너마을 뿔리아탄(Peliaton)이라는 곳이다.
가정집같은 집을 들어서니 집 한가운데 큰 사당이 있고 작은 담이 있는뒤로 방갈로가 3채 있었다.
주변은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는 아름다운 방갈로였다. 방갈로는 뿔레이탄 전통 양식의 고풍스런 조각을 곁들여 만든 훌륭한 집이였다.
샤워실은 하늘을 볼 수 있도록 했고 돌로 쌓은 벽은 식물을 길러 숲속에서 샤워하는 기분이 들었다. 테라스에는 통나무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있으며 밖에서 누워 있을 수 있도록 등나무 침대를 별도로 배려해 놓았다.
아내와 함께 이곳에 왔다면 다시 한번 신혼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리라.
아침식사는 푸짐한 열대 과일을 제공해주는 것이 얼마간이라도 묵고 싶은 집이였다. 일하는 젊은 아이는 부지런하고 친절했다. 아쉬운
것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아이의 한달 월급이 24,000원이라니 측은하기도 했지만 인도네시아 전반적인 임금이 이러함을 어찌하랴.
저녁을 먹으러 식당을 찾아 가는데 한떼의 여자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머리에는 힌두사원에 바칠 음식을 예쁜모양으로 머리에 이고 줄을 서서
지나가고 있어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멈추게 하고 사진을 찍자고 하니 흔쾌히 응락한다.
이곳 쁠리아딴의 여자들은 미인이였다. 지금까지 인도네시아에서 반둥의 여자들이 제일 미인인것 같고 다음이 쁠리아딴 같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포즈를 취해 주는 그들은 한결같이 웃으며 대해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붓에서 공연되는 Gabor Dance를 보려 하니 숙소의 종업원이 자기 친구차를 이용해 우붓의 공연장까지 실어다
주었다. 공연장은 많은 외국인이 자리했고 2시간 동안의 발리 전통 가무란 음악을 배경으로 공연하였다.
Cental Bali 유적지
오늘은 차량을 대절하여 발리의 몇 곳을 둘러 보기로 했다. 마침 옆 방갈로(BANGALOWS)에 묵었던 프랑스 젊은이와 나이가 좀
많은 여자가 동행키로 했는데 이 두사람의 관계는 부부 관계는 아닌 묘한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지만 이 두사람은 내내 나에게 친절했다.
먼저 불교 사원인 부드굴(BEDULU)에 갔으나 불교다운 모습은 없고 힌두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이 모든 곳에는 샤롱이라는 천으로
치마처럼 두른 후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다시 땀빡 실링에 있는 뿌라피르따 엠뿔(PURA TIRTA EMPUL)로 향했다. 성스러운 샘이 있는 절이란 뜻이다. 이 샘의
신비스러움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땅밑으로 부터 자연스럽게 자갈이나 모래를 헤치면서 물이 솟아 오르고 있는 것이다. 물은 무척 깨끗하고
샘물 수면에는 연꽅잎이 가득차 있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이 샘에도 신통력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몸을
정갈하게 하기 위하여 찾아 온다고 한다.
이곳을 구경하고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오는데 개울가 쪽으로 화장실 같이 생긴 곳에 사람 소리가 들려 화장실인줄 알고 그곳에 들어가 보니
이 왠일이란 말이가! 갑자기 앞에 벌어진 일이 하도 황당해서 황급히 뛰어 나왔다.
밖에 나오니 현지 남자가 빙긋이 웃는다. 이곳은 화장실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매일 같이 하는 만디 장소였다. 우리네의 목욕탕인데 그것도 여자 목욕탕이다. 벌거벗은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만디를 하는 곳에 용변을 보러 들어 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이 브사끼(BESAKIH) 사원이었다. 브사끼 사원은 힌두교의 브라흐마나, 비슈누, 시바를 모신 복합 사원이다.
세개의 주 사원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여러 사원을 거느리고 있는데 현재 30여개의 절을 포용하고 있다. 브사끼 원이 건립된 것은 힌두교가
발리섬에 건너 오기 전이라고 하니 10세기 전이 된다. 발리에서 최대이면서 최고의 사원인 것이다.
브사끼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섬사람들의 생활을 지키고 생명의 근원으로 사랑을 받으며 외경되어 오기도 한 아궁신에 대한 기도의 자리
였으리라. 브사끼는 섬의 중심 사원임과 동시에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성소이기도 하다. 지금도 왕가의 자손들은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사원내의 건물 일부를 유지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한다.
브사끼를 돌아보고 4일전에 폭발한 화산을 찾아 가기로 했다. 원래 작은 화산이 있었으나 다시 대폭발을 하여 대서특필된 신문을
보았던지라 그곳으로 차를 돌렸다. 도착한 화산은 전망도 좋고 산밑으로는 우리나라 지도 모양같은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분화구에서 뿜어 오르는
연기는 하늘 높이 솟아올라 맞은편 벼랑에서 보는 화산의 전경은 장관을 이루었다.
경사가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다 전망이 좋은 식당에 들려 식사를 하고 조각의 마을 마스(Mas) 를 찾았다. 이곳은 조각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마을이다. 도로를 조금만 들어가면 공방이 있다.
재료는 흑단과 티크를 사용하여 만드는데 전문가로 인정 받는데 20년이 걸린다고 한다. 힌두 종교를 소재로한 조각 현판은 천재적인
조각가가 아니면 가히 만들수 없었을것이다.
몇곳의 공방을 돌아 보고 이웃에 있는 우붓으로 예술가의 마을에 갔다. 이곳은 발리 미술의 정수를 볼수 있는 곳으로 수많은 미술관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림에 문외한으로선 무엇이라 말할 수 없겠지만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발리 농촌으로 차를 몰아 발리 사람들의 추수하는 모습을 보러 갔다. 이들의 추수 모습은 옛날 우리네 모습과 비숫해 나에겐
별관심이 없었지만 함께 간 프랑스 사람들은 신기해 하며 사진을 찍느라 바빳고 또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하루의 일과는 끝났다.
어둠이 깃들어 오자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를 하고 우붓에서 공연되는 바롱 댄스를 관람했다.
마지막 밤을 Kuta에서
내일이면 여행을 마치고 귀국을 해야하는 입장이라 오전은 우붓과 마스 지역을 다니며 약간의 기념품을 준비했다.
돌아오는 길에 여행사에 들려 꾸따로 가는 차편을 예약하고 숙소에 돌아와 짐을 챙기고 주인 가족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여행사 차는
숙소까지 와서 우리를 픽업해 갔다.
오랫만에 꾸따에 돌아와 사진관에 들려 그간 찍은 필림을 맡겼다.
이곳은 한국보다 인화하는 값이 싸서 모두 사진을 뽑아 가기로 한것이다.
꾸따 해변가에 있는 호텔 식당에서 맥주를 기울이며 20일 간의 긴 여정을 되돌아 보았다. 실로 식사도 하지 못하면서 부지런히 자와섬과
발리, 롬복을 돌아 본것이다. 내일 저녁이면 인도네시아의 여행도 끝나고 가족 생각이 나 국제 전화로 안부를 묻고 도착 시간을 알려
주었다.
늦잠을 자고 오전중은 꾸따 비치로 나와 마지막으로 해수욕을 즐겼다. 해변은 언제나 처럼 이방인의 차지라 이곳만큼은 서구의 어느 한곳
처럼 느껴진다.
해변에는 서양인 뿐으로 동양인은 보기가 힘들 정도다.
오후에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버릴것은 버리고 짐이 파손되지 않게 베낭을 꾸리고 나니 이 짐만 부치면 가볍게 한국까지 도착할 수
있으리라.
꾸따지역 밤거리를 돌아다니다 늦게 택시를 이용하여 공항으로나가 짐을 부치고 출국 절차를 밟고 대기실에 들어가 출발시간을 기다렸다.
이때서야 한국인을 볼수 있었다. 여행중 한명의 한국인도 보지 못하다 귀국하는 공항에서 단체 관광객들을 볼수 있었다.
시간이 다되어 비행기에 탑승하려고 게이트쪽의 발을 옮기는데 안내 방송이 나를 찾고 있었다. 급히 사무실로 오라고 한다.
왠 일인가 싶어 사무실에 찾아가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이번 비행기에 탈 수 없다고 한다. 나도 미리 예약 확인을 마치고 출국 절차를
마친 상태에서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항의를 하니 직원은 나를 달래느라 안절 부절 한다.
단체 관광객에 우선을 하다 보니 좌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항공사의 불찰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당당하게 항의 했다.
항공사에서는 호텔의 숙식과 교통편, 그리고 항공좌석의 등급을 상향 조정해서 해주겠으니 양해를 해 달란다. 시간도 흐르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의 안내를 받아 차를 타고 다시 꾸따에 있는 특급호텔에 숙소를 정해 주고 아침에 다시 픽업하러 오겠단다.
이 숙소는 상당히 비싼 곳이다. 내겐 엄두도 못낼 곳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호강을 하게 되었다. 방에는 미니 바까지 되어 있고
냉장고를 여니 먹을 것이 가득 하였다. 이것저것 꺼내 먹기 시작했고 맥주도 한 잔하고 호화판이었다.
양주를 한 병 먹어 볼까 생각하고 뚜껑을 따려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냥 자리에 놓았다. 잠을 한참 자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항공사에서 차가와 기다린다고 알려 준다.
방을 나가려니 호텔 종업원이 들어와 냉장고를 열고 내가 먹은 것을 확인 하고 사인을 요구한다. 후론트에 나오니 돈을 내라고 말해
이것은 항공사 부담이 아니냐고 말하니 다른것은 항공사에서 다 부담 하지만 알콜은 본인 부담이라고 한다. 할
수없어 어제 먹은 맥주값에 세금까지
포함에 지불했지만 내가 먹은것이 많은지라 마음이 상쾌했다.
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니 내 탑승권은 로얄 크라스로 배정 되었으나 홍콩까지 가는 가루디 항공이였다. 어제 부친 짐은 서울에 잘 가
있는지 걱정도 되고 뒤숭숭한 기분으로 항공기에 오르니 지금까지 내가 여행하며 타고 다니던 좌석보다도 판이하게 달랐고 대접 또한 융슝했다.
내릴때는 선물까지 주었다.
홍콩 공항에 내려서면서 걱정이 되었다.
어디가서 얘기를 해 서울가는 항공기를 타며 항공사에서 어떤 증명도 받은 것이 없지 않는가. 하여튼 소속 항공사를 찾아가면 해결되지
않겠는가
스스로를 위안하며 공항에 들어서는데 홍콩 공항의 여직원이 피켓에 내 이름을 붙이고 서 있고 그 옆에 남자 직원은 무전기를 들고 나를
찾고 있었다.
피켓을 보고 그 앞으로 가니 내 인적 사항을 확인 하고는 사무실로 여직원이 안내를 한다. 조금후에 타이 항공의 로얄크라스 티켓을
가지고 타이 항공 출발 게이트까지 안내해 주고는 한국의 집에도 연락을 해 놓았고 짐도 안전하게 한국에 도착해 있다고 알려주고 떠나갔다.
이제야 한숨 돌리고 이 비행기만 타면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자칫 국제 미아가 되는 기분이었다. 타이 항공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타이항공 사무실을 찾아가니 내 베낭은 주위를 테이프로 감아 분실 우려가 없게 보관을 잘하고 있었다. 우리 집까지 배달을 하려 했지만 내가
공항에서 짐을 찾을지 모르니 그냥 보관하라는 아내의 뜻에 따랐다고 한다.
Terimakasih
이번 여행에서는 또 다른 생활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느 나라나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에 맞게 잘 적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자신의 자로서 그들에게 잰다는 것은 엄청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현지에서 만난 인도네시아의 대부분은 상당히
친철했고 순박한 모습이었다. 산천은 풍요로웠고 자원은 풍부 했지만 다만 창의력이 뒤지고 욕심이 적은 면을 느낄 수 있다. 낙천적인
국민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도움을 준 현지인에 감사한 마음이다. 여행 중에 만났던 서구의 많은 여행자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더우기
이번 여행에 적극 협조해 준 아내에게 뜨거운 사랑을 보낸다.
이 큰 세상의 언제 어느곳이 또 나를 손짓하고 있을건가. 나는 꿈을 헤메듯 미지의 이국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십여일간을 거대한 품속에 나를 안아 주었던 인도네시아. 감사합니다.(Terima kassih) 글/사진
: 최남순 cns24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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