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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000 미터가 넘는 설산이 보이는 seans 게스트 하우스는 손님들의 저녁식사 준비가 한창이었지만,
저 아래 까마득한 협곡 아래 흐르는 장강에는 아직 해가 두 걸음은 남아 있었다. 이곳은 중국의 서쪽 끝이니, 중국의 표준시보다는 해가 한참
더 길다.
나는 슬리퍼를 끌고 나갔다. 조미가 된 해바라기씨 한 봉지를 사 들고, 호도협의 몇 굽이를 찬찬히
걸었다. 마지막 한 굽이만 더 돌고 숙소로 돌아 가려고 맘 먹었을 때 저쪽에서 작은 방울소리들이 들려왔다. 모퉁이를 하나를
넘어서자 염소 몇 마리가 이쪽으로 딸랑딸랑 걸어오는 게 보였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사내 하나가 다 헤어진 양복을
입고 품에는 새끼 염소를 한 마리 안고는 그 뒤를 따라 오고 있었다. 험한 길이라 안고 가나 보다. 아무리 궁해도 저것들을
내다 팔지는 못할 성 싶었다.
인사를 건네자, 그는 잠깐 당황해 한다. 그는 품에 품고 있던 새끼 염소를 땅에 내려놓고 나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가 몇 생을 거스른다 해도, 어찌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때, 땅에 놓인 새끼 염소는 어머의 젖꼭지
쪽으로 쪼르르 달려 가고 있었다. 그 모냥 구여워서 내가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그제서야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염소떼들과 사내는 내가 서 있던 쪽으로 모퉁이를 돌아 찬찬히 걸어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길의 난간에 앉아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래로는 천길 낭떨어지 그리고 가끔씩 낙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날은 이제 거의 깜깜해졌고, 하늘에서는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2.
숙소에 돌아와 누웠더니, 침대가 따뜻하다. 전기장판이 놓여 있었다. 나는 이것이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기해하며 그곳에 엎드려 친구에게 엽서를 썼다.
이제 이곳은 아주 춥습니다. 배낭에 있는
옷들을 다 꺼내입으니, 배낭은 텅텅 비었습니다.
리장(여강)을 떠날 때만 해도 봄날이었는데 말입니다. 버스에 올라타니 버스기사
양반이 아주 특별한 서비스를 해줍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손님들께 한 대씩 권하더만요. 그렇게 출발한 버스는 드넓은
분홍빛 자운영과 노란 유채꽃밭 한가운데를 달렸습니다.
나는 조그만 미니버스에 실려 무슨 말이라도 탄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봄노래를 흥얼거렸더랍니다. 구멍 가게가 보이면 차를 세워 중국 매실주라도 한 병 마셔야지 했지요.
이곳은 이제
운남성의 거의 끝자락입니다. 해가 지고 나면 하늘빛이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푸른빛으로 채워집니다. 나는 낮잠을
들다가도 혹 그때를 놓칠까봐, 알람까지 맞춰둔답니다.
유명산 자락은 이제 봄이 한창 깊었겠습니다. 거긴 이제 보일러를
낮춰고 있겠지요?
안녕.
다음날 일찍 산행길에 올랐다. 멀리 보이는 계단식 논밭에는 보리들이 노랗게
익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선선한 기운도 잠시. 협곡의 저 쪽에서부터 구름이 밀려오면 나는 어느새 구름 빗속을
걷고 있었다. 눈 앞은 온통 하얗게 빛나고 나는 구름을 입김으로 호호 불으며 한 발씩 길을 찾아 내딛었다. 구름이 걷히면 길은
다시 멀리까지 보이고 천길 낭떨어지 아래로는 장강이 굽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위로는 설산이 환하다.
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상상력을 지니고 있겠어!
3. 어디선가 또 다른 세찬 물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재촉해서 한
굽이 더 휘어들자, 눈 앞으로 거대한 폭포가 서 있다. 폭포의 물줄기 중간으로 내가 갈 길에는 다만 돌덩이 몇개가 가로 놓여져
있었다. 그 곳을 건너다가 몸의 한 쪽이 흠뻑 젖었다. 하지만 볕이 좋았으므로 잠바와 바지를 벗어 바위에
널어두었다. 숙소에서 사온 사과 하나를 입에 베어 물었다. 이 척박한 땅에서 삼키는 싱그러운 과즙에 감사했다.
낯익은
방울 소리가 또 들린다 어제 그 염소들인가 싶어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두 마리 말이 이 쪽으로 짤랑짤랑 걸어오고
있다. 등짝에는 양쪽으로 무거운 짐 바구니 두 개가 걸쳐 있었다. 말들이 이렇게 험하고 높은 길도 다니는구나!
고삐를
잡고 걸어오던 사내는 내 바로 앞의 바위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인사도 없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말 등에 얼굴을 기대고는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다. 그의 몸짓과 눈빛이 나는 왠지 애틋해져서는 속으로 천천히 한 글자씩 이렇게 중얼거려
보았다. 기. 대. 어. 바. 라. 본.다.

저 얼굴, 저
표정 뭐라 말해야 할까 학창 시절에 보았던, 소설가 조세희씨의 사진집 '침묵의 뿌리'가 번쩍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강원도
사북의 탄광촌 풍경과 사람들의 얼굴을 담은 사진첩 페이지들이 그의 얼굴 위로 한 장씩 한 장씩 넘어가고 있었다. 사진 속의 한
젊은이 눈빛에서 책장은 멈췄다.
어찌보면 원망하는 듯도 하고 어찌보면 겁먹은 듯도 하고 어찌보면 오히려 나를 안타까이
쳐다보는 듯한 그 눈빛!
나는 맘으로 그에게 묻는다. '왜 나를 그렇게 꿈쩍않고 쳐다보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그의
시선이 불편한 게 아니다. 누군가의 눈빛을 이리 오래 편하게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무슨 순한 짐승이 상처를 입고도 신음소리
하나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는 듯한 그 눈빛. 나도 이곳에 살면 저런 눈빛을 지닐 수 있을까? 어두지도록 여기서 꿈쩍 않고 그
눈빛을 바라보고 싶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다시 방울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길은 이제 막 내리막으로 접어 들고 있었다.
4.
조금 더 걸으니 마을이
보였다. 여느 여염집 같은 작은 게스트 하우스도 하나 있었다. 멋진 이름의 간판이 붙어 있었다. 다마빈관(茶馬賓館). 차와
말이 있는 여행자의 집! 하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부엌에 들어가 보니, 나무 난로만이 따뜻하게 지펴져 있었다 그 위에는 물
주전자 하나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솥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얀 이밥이 익는 냄새가 난다. 의자를 바짝 당겨 난로 옆에
앉았다. 뒤늦게 들어온 주인 여자는 그저 환하게 한 번 웃고는 커다란 국자로 가마솥에서 끓고 있던 하얀 콩국을 떠서는 천을 올려
놓은 대나무 채 위에 붓는다. 두부를 만드나 보다. 이미 간수를 쳐서 콩국은 덩이덩이 하얗게 엉겨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가리켜
두부국을 먹고 싶다는 시늉을 했다. 이내 따끈한 순부부 한 사발이 나온다. 소금 간만 한 맑은 국물이었다. 배고픔을 달래고
나니 오후부터 시큰거리던 왼쪽 무릎이 한층 저리게 느껴졌다. 보온병에서 뜨거운 물을 따라 찜질을 하며 난로가를 한참 더 지키고
앉아 있었다. 여행자들이 하나 둘씩 숙소로 들어온다.
5.
저녁 설겆이가 끝나고, 부엌이 다시 말끔해졌을
때 나는 따끈한 차를 커다란 잔에 가득 넘치게 들고 나와 마당과 집 주변을 거닐었다. 구름은 어느새 걷히고 밤하늘에는 별들이
하늘 가득 총총하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서서 별들을 읽어본다. 이곳의 밤하늘은 우주의 비밀이 가득 담긴
점자(點字)책 같다. 하지만 좀처럼 나는 그 별들의 글자를 읽을 수가 없었다. 별들을 노래했던 어느 시인을 떠올리며, 나는
별들을 읽고 또 읽어 보았다. 마지막 남은 차 한 모금을 마셨을 때였을까 허공에서 문득 이런 글자들이 읽혔다.
'우린
이제 밝음 속으로 사라질라오. 나그네는 어둠 속에 홀로 남아 편히 쉬시라.'
한참 걸려 읽어냈건만, 그건 사실 별 말이
아니었다. 그저 즐거운 우리들이 안부였으니.
아, 장강 협곡 밤하늘에는 그렇게 별들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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