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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쁘레소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take-out 커피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고, 그에 비례해서 커피를 즐겨먹는 인구도 늘어나고 있지만, 이 쓴맛의 커피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앙증맞게 작은 잔에 담겨 나오지만 워낙에 진국(?)으로 뽑기에 그 속엔 엄청난 양의 카페인 성분이 들어있어 에스쁘레소를 마시면 가슴이 벌렁댄다는 사람도 있단다.

  

하지만 빠리에 사는 인간들은 이걸 시도 때도 없이 홀짝댄다. 아마 서울의 커피자판기 수와 비등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까페에서 출근할 때 한잔, 식사하고 한잔, 사람과 만나 한잔, 어디 다녀오면서 한잔, 걷다가 힘들면 쉬며 한잔, 그렇게 마셔댄다. 빠리에 머무는 동안 나도 이 진한 커피를 제법 -- 어디까지나 우리의 기준에서 볼 때 -- 마셨는데 다행히 가슴이 벌렁거리고 잠이 안오는 현상은 없었다. 게다가 마시다보니 동안 카페마다의 고유한 분위기 속에서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과 씁쓸한 맛을 조금은 즐기게 되었다.

이상한 것은 한국에 돌아와 몇 번 이걸 마셔보았는데 빠리에서의 그 맛이 나질 않는다는 점이다.  덕수궁 옆 자그마한 take-out 커피점에서 커다란 종이 컵 바닥에 깔려나온 에스쁘레소를 마실 때는 황당한 느낌마져 들었다. 역시 이건 빠리의 까페에서 마실 때가 제격인 것 같다.

 

개똥

빠리의 거리를 수놓는 것은 아름다운 건물도, 샹젤리제의 화려한 네온도 아닌 개똥이다. 겨울에만 빠리를 갔으므로 그나마 여러모로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걸 밟으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올 때 비닐 봉지 하나만 챙기면 되련만...

개똥으로 빠리를 특징짓거나 그곳 사람들의 도덕성 문제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뭐라고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곳에서 느껴지는 다분히 자유방임적인 분위기를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담배의 해악이 나날이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선진국 중 최고 수준의 흡연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매년 관광객들이 엄청난 돈을 뿌리고 가지만 관광객 편의증진에 크게 괘념치 않는 심드렁함도 그렇다. 개똥이 거리에 넘쳐나도 그러려니 할 뿐,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거나 소란스러운 일은 없다.

이러한 사고나 태도가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시민계도 캠페인과 운동이 넘쳐나고 때마다 유행이라는 열병이 휩쓰는 모습을 보면 가끔은 그런 덤덤함이나 무관심 같은 게 그립기도 하다. 참고로 난 담배를 많이 피운다.

 

옷차림

흔히 빠리를 패션의 도시라고 부른다. 그러나 튀는 옷차림을 보려면 빠리보다는 차라리 동경이 더 나을 것이다. 실제로 빠리에 가보면 눈에 띄게 화려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옷 색깔도 겨울에는 회색이나 검정 같은 무채색이 주류를 이룬다. 스타일에도 공통된 유행이라는 게 없다. 그냥 자기 좋은 대로, 편한 대로 입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옷차림에 이러니 저러니 신경 쓰지 않는다. 그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

 

그러나 아주 가끔 패션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루브르궁 근처의 한 까페에서였다. 약간 소란스러워 뒤를 돌아보니 여자들이 들어와서 웨이터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세명 모두 투피스에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여자의 모습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Moon River라는 영화에서 오드리 햅번이 쓰고 나왔으면 어울릴 것 같은 넓다란 챙에 노란색 깃털이 장식된 초록색 모자.(사진)  정작 영화의 배경이었던 뉴욕에서도 평상시에 저런 모습으로 다니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표정과 몸짓이 자연스러워서였을까? 요즘의 튀는 옷차림은 거칠거나 야한 느낌이 강한데 비해서 그녀의 옷차림은 지극히 복고풍이면서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만약 커피샾에서 저런 모자를 쓰고 앉아있는 여자를 서울에서 본다면? 빠리는 빠리다.

 

음식

사실 난 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먹고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무지 높은 물가도 한 몫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점이다. 알려진 대로 빠리에서는 영어가 잘 통하지 않고 이것은 식당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말이 잘 안통하면 영어메뉴라도 준비되어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배려도 없다보니 거의 찍기 수준으로 시킨 음식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경우를 종종 겪게 된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햄버거(빠리 인간들도 많이 먹는다), 바게뜨를 번갈아 찾게 되는데 바게뜨 먹다가 입천정이 까지는 사태가 발생할 때면 처량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현지 사정에 어두운 외국인에게는 좀 더 친절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지도 않다. 한번은 저녁식사를 하러 혼자 식당에 간 적이 있다. 저녁식사는 7시부터였는데 그때 시간이 6시 50분. 아직 시간이 이르니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하기에 10분밖에 안 남았고 날씨가 추우니 안에서 기다리면 안 되겠냐고 요청했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그놈의 관습엔 그 정도 여유도 없는 건지... 화가 나서 그곳을 나와 근처의 한국식당을 찾아갔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정기휴일. 결국 호텔방에서 바게뜨를 씹었다. 빠리는 그날 나를 두 번 죽였다.

 

날씨

빠리가 맘에 안 드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겨울 날씨이다. (다른 계절의 날씨는 모른다. 겨울에만 갔으므로) 겨울엔 거의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다. 가끔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는 때가 있기는 하지만 매우 짧은 시간이고 대부분 찌푸린 날씨에 거의 매일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작년 말에 갔을 때는 이상난동이었지만 춥기는 서울보다 더하다. 아마 비가 자주 내려 습도가 높은 영향도 있겠지만, 바람은 또 왜 그렇게 부는지...

처음 빠리에 갔을 때 우습게 생각하고 동계용 등산복에 방풍재킷만 가져갔는데 그게 아니었다. 막상 도착한 빠리는 너무너무 추웠다. 샹젤리제 거리를 휩쓸 듯 불던 바람, 에펠탑 꼭대기와 세느강 유람선 갑판에서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떨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게다가 몸이 꽁꽁 얼어 돌아온 호텔방 난방은 왜 그리 시원치 않은지... 겨울에 빠리에 갈 일이 있거든 꼭 두꺼운 오리털 점퍼, 모자, 장갑, 목도리 등을 챙겨 가기를 권한다. 내복도 좋은 생각일 것 같다.

 

맺음말

나는 여행지로서 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빠리에서 보다는 동남아에서 훨씬 더 편안하고 배낭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도 동남아 여행을 권한다.

따져보자면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모로코의 페즈(Fez)처럼 빠리보다 더 고풍스럽고 유서 깊은 도시도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 도시에 대해 빠리 만큼 환호하지 않는다. 적절한 현대 문명의 화려함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려서부터 서양중심의 역사를 여과 없이 교육받은 영향?

작년 말 빠리를 다시 찾았을 때 에펠탑을 보면서 시내 한가운데 난데없이 불쑥 솟아오른 철 구조물이 멋대가리 없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 자리에 개선문처럼 웅장한 석조물이 서 있었으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보면 단순한 쇳덩어리에 불과한 것을 빠리의 상징이라고 포장하여 관광상품으로 팔고 있는 사람들의 수완도 대단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빠리를 빠리로 만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지?

    글/사진 : 김재훈 myhome.hanafos.com/~sal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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